설교원고

주님과 동행 (시편 23:1-6)

Johnangel 2024. 8. 13. 22:52

주님과 동행 (시편 23:1-6)

                                                

우리 인간이 물어왔던 모든 질문 가운데 가장 진지한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하여 가장 통찰력 있는 대답을 시도한 사람은 “1600년대를 살았던 불란서의 천재 철학자 파스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쓴 “팡세”에서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분쇄한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의 내용은 “다윗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권력도 재물도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잘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권력과 그의 재물”이, 자신의 영적인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그는 “자신의 분수”를 지켰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시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바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목자”라면 “우리 모든 인간은 양”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양과 같은 우리 모든 인간의 문제에 목자로서 해답이 되신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시는가?”를 이해하기에, 앞서 문제 속에 있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과 같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인생고백을 통해 우리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쉴만한 물가”는 양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잔잔한 물가”를 말합니다.

양이 자기의 길을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리, 목자의 인도함을 따라 그 길을 동행할 때, 거기에서 양은 “삶의 평안함과 잔잔한 물과 쉴만한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겨야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참 목자가 되셔서 “당신이 계획하신 최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 “안위”란 말은, 눈물을 닦아주고, 새 힘을 북돋아 주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질병과, 자녀문제 등의 어려움들이 면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의 목자가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신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실 양은 멀리서 겉으로 보면 깨끗해 보이지만, 가까이 있으면 냄새나고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타락”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의롭다할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인간은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스로 만든 그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핵무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핵무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교통사고율 세계 제1위의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모종의 종양이라도 발견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힘이 빠져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오늘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고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요,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 무려7,000번이나 나오는 단어인데,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길 잃은 인간의 목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요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기 위해 “나와 함께 잃은 양들을 찾자”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3.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될 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의미하는데, “총애를 받는다, 혹은 직분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존귀하게 대우하시는 주님을 만날 때, 예외 없이 우리의 삶도 흘러넘치도록 감동적인 삶을 누립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실 “솔로몬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여호와의 집은 장막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계시는 곳이기에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약속이고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날 사랑하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의 결단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 시대의 민중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세우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그 제자들이 또 다시 각각 12명 내외의 영혼들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알고, 목회  비전을 이루어가며 우리의 큰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