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로마서 2:12-16)
오늘 본문은 도덕적 이간 중 두 번째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양심주의자들은 인간의 양심으로 “모든 의와 선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양심을 어떻게 보십니까?
딤전1:5절에 보면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고, 딤전1:19절에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느니라.”고 했고, 딤전3:9절에서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의 양심 자체는 “본래 더럽고 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인간의 양심자체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 스스로 양심을 정화하고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웅덩이에 썩은 물이 가득 차 있을 때, 이 썩은 물은 스스로는 정화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정화제를 넣거나 살아있는 생수를 공급해야 정화될 수 있습니다.
죄에 의해 타락한 양심도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회복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양심을 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더불어 본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봅니까?
세상을 보는데 “세상과 더불어 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더러운 양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을 나누는 기준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양심은 세상적 기준에 따라 늘 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양심은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10원을 도둑질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이 100원을 훔칠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1원밖에 훔치지 않았다고 합시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누구를 더 양심적이라고 하겠습니까?
1원을 훔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10원을 훔친 사람보다 깨끗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10원을 훔친 사람이나 1원을 훔친 사람이나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타락한 양심을 가지고 인간은 서로 “저 사람은 양심적이다. 저 사람은 양심이 올곧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양심적이라는 말 자체가 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에 대한 성경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을 바탕으로 양심주의자를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뉩니다.
1. 하나님의 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양심주의자입니다.
12절 상반절에 보면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라고 했습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입니다.
즉 법이 없는 곳에는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뿐이지, 죄는 죄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당시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법을 말씀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시치미를 뗐습니다.
“죄가 죄인지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욕망으로 그 형상, 그 양심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양심을 가지고 완전한 의를 내세우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불가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관습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동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넷이나 두어도 아무런 고민이 없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다처제가 그 사회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기사들 사이에 결투가 유행했습니다.
“누가 자기를 모독했다.”고 생각하면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도 합법이었습니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기보다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회의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타락한 양심을 따르면 진리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감정, 자기 이기심, 자기 판단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법 없이 양심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잣대 없이 우리의 양심대로 살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2. 양심주의자의 두 번째 부류는 어떤 사람입니까?
12절 하반절에 보면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 양심만으로 하나님의 법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힘, 자기 공로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법을 “상대적으로”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10%지키는데, 나는 20%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만족, 자기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인이라 착각하며 살다가 결국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함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 없이 양심대로 살겠다.”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법을 알지만 하나님 은혜 없이 양심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오직”이며, “행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테스”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몰라도 “자기 양심대로만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 100%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양심이 곧 그에게 하나님의 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날, 그 양심이 고발도 하고 변론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양심대로만 살아도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은 13-16절까지의 말씀은 문장형태가 긍정이 아닌 부정을 강조하는 반어법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론적으로 엄격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바울은 롬3:20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설명하며, 롬3:10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점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증명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은 작게는 십계명이고, 넓게는 모세오경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성경말씀 전체입니다.
이 계명이 인간에게 언제 주어졌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갔을 때입니다.
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소위 “양심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시대에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전부 타락해서 심판을 받고 노아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가?
창6:8절을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에 보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은밀하다.”는 말은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럴듯한 변명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진실로 이해하고 깨닫고 나면 감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셨으면 지금쯤, 도덕을 부르짖는 비도덕적 인간, 알량한 자기 양심을 믿고 천방지축 날뛰는 인간이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셋째는, 우리의 부족한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롬3:2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의 모든 부족한 의를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전5: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세 가지를 깨달아 늘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요3:3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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