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그 행한 대로(3) (로마서 2:6-11)

Johnangel 2024. 8. 14. 18:56

그 행한 대로(3) (로마서 2:6-11)
                                           
7절을 읽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그런데 한글 성경과 헬라어 원문의 순서가 다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헬라어 “독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사랑에게는 이 단어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진리를 향해 서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존귀”를 구하는 것입니다.
존귀는 헬라어로 “티메”인데 그 본뜻은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7:6절에서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돼지는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썩은 것이든 상한 것이든 영양가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먹습니다.
배만 부르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하고 따지기 전에 자기 욕망과 이권에 맞아떨어지고 자기 배만 부르면 먼저 취하고 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삼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모든 욕망과 야망을 뛰어넘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썩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주님을 향해 삶을 결정짓는다는 것,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 영원한 가치를 따진다는 것은 진리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3: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에 관심 있는 사람은 썩어질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해 사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썩지 않는 진리를 주목합니다.
그런데 7절은 이것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있는 “참고 선을 행하여”라는 구절은, 정확하게 말하면 “참고 선을 행하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구함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선을 행하는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7절 하반절에는 이런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삶은 이미 영생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죽음이란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고후5:1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자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 위의 새로운 장막이 우리에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늘 속게 될 것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여기 “당”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이아”는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기 위해 짝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이 사람과 짝하여 저 사람을 욕하다가, 내일은 저 사람과 짝하여 이 사람을 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소설가 몇 분과 평론가 몇 분이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자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욕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가자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욕했습니다.
서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아무도 화장실을 못 갔습니다.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기에 대해 문 욕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리데이라”의 본래의 뜻은 “경쟁”입니다.
롬1:29절에 나오는 “시기”의 뜻도 경쟁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며 당을 짓는 일을 누가합니까?
헛된 경쟁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13-15절을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많은 교인들이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게 되면 그 모습을 배아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리데이아” 즉 경쟁 때문입니다.
8절에서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은, 우리가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많이 낸다 해도 헛된 경쟁심으로 남을 정죄하고 중상모략한다면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무엇을 따른다는 것입니까?
“불의를 따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헬라어로 “아디키아”인데 “부정”이라는 뜻도 있고, 좀더 풀어서 말하면 “공평하지 않은 것을 행함”입니다.
나 하나 잘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불의입니다.

8절에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따르다”인데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믿는다”라는 뜻과 “설득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양심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성경말씀과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적당하게 부정하고 불의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불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면 안 돼.”라며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불의를 조장합니다.

본문7-8절이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에 주어지는 심판에 관한 내용이라면, 9-10절은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지는 심판을 말씀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하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린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설령 그에게 환난과 곤고가 주어진다고 해도 반드시 그는 일어서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삶의 방향을 튼 사람에게는 환난 자체가 죽음이자 저주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면 마음이 편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것은 도처에 자기 적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 사람은 겉으로는 편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절대 편할 수 없습니다.
불법으로 권세를 잡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누가 자신을 헤칠지 몰라 늘 불안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정한 평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주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이 땅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평강”리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실 때 사람을 차별함 없이 고평하게 하십니다.
주님께 어떤 심판을 받을지는 이제부터 우리 삶의 방향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좁은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