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의지하여 (로마서 2:17-29)
오늘은 도덕적인 인간에 속하는 마지막 부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만물은 하나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라는 말은 “형식” 혹은 “형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겉과 속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내용, 의미, 속보다는 형식, 형태, 겉이 전부인양 착각하며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에 사는 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롯이 살고 있는 소돔은 타락할 때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롯에게 하나님께서 성을 멸하실 것이니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롯이 사윗감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떠나자”가 아니라 “떠나라”고 말했다는 것은, 자신은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9: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롯의 손을 잡아끌어 성 밖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런데 롯은 성을 나와서도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머물렀습니다.
소알은 소돔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롯이 이와 같이 행한 이유는, 소돔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도시 소돔에 왜 그토록 미련이 많았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인데, 겉모습 때문입니다.
소돔은 화려하고 모든 것이 번쩍번쩍했습니다.
그러나 헤브론은 소돔에 비해 겉모습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헤브론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속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곳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껍질이 아니라 속을 보는 것이고, 겉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속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삼상16: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입니까?
겉만 보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절대로 겉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겉만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면, 죄악의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창3:6절은 선악과나무에 대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겉은 이토록 탐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죽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창2: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속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겉에 현혹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칫 잘못하면 겉에 치중하게 되는 덫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형식 논리에 빠지고 겉모습으로 자꾸 실족하게 됩니까?
자신의 겉이 변하면 속도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겉만 치중하는 삶을 사는 한, 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겉, 형식, 형태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을 가리켜 형식주의자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외식주의자라고 하셨습니다.
17-20절을 읽겠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여기에서 율법주의자가 치중하는 5가지를 설명합니다.
1) “율법을 의지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따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613개로 나누었습니다.
그중에 248개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 365개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으로 분류해서 그 율법들을 전부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하나님을 자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사에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인쇄할 수 없었기에 손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쓰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쓰는 것을 멈추고 목욕을 하고 와서 썼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니아” 즉 “나의 주님”이라고 바꾸어 읽거나 소리 없이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어 글자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의 여러 역본들 가운데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번역하고, 공동번역성경은 “야훼”라고 번역하는데,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3)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내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사실 “말씀으로 나의 욕심을 강화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선택하게 됩니다.
4)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분간한다는 것은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알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중 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을 장려하고 칭찬할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5)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잔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며 어둠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인도해 내는 말씀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절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 양심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만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완벽한 신앙인처럼 보이고, 아무런 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21-24절은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입니다.
여기에서 “네 자신”이란 “속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가르치는 사람의 속사람은 전혀 바꾸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속이 비어있다면 오히려 괜찮습니다.
속을 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잡초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2)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법률로 금하는 도둑질은 절대로 하지 않는데, 속은 도둑질을 일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도둑질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다는 이 기준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는 도둑질입니다.
3)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마5:27-28절에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여자의 몸을 맞대지 않았다면 간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그와 분명하게 다릅니다.
4)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도둑질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신 여호와를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가증히 여겼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또한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치는 것도 어리석은 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전의 우상 앞에 물건이나 현금을 바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신전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을 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 물건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의 논리는 “우상은 신이 아니다. 돌이나 나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돈이나 물건을 바쳐도 우상은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즉 그 물건들은 주인이 없는 물건이므로 먼저 발견한 사람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식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우상 자체를 정말 가증히 여긴다면,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 또한 가증하게 여겨야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앞에 놓인 제물을 거리낌 없이 취한다는 것은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에 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돈이나 명예,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은 참 많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 앞에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5)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입니다.
겉으로는 그토록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를 욕되게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부처를 믿는 불자들이 불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 부처를 욕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신앙인다운 속사람의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앞서 우리는 율법주의자의 외적인 특성 5가지를 살펴보았고, 이어서 내적인 특성 5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외적인 특성만 볼 때는 완벽한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보니 추악하고 악취나는 모습을 가득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주의자를 가리켜 마23:27절에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눈치를 잘 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속을 보지 않고 겉만 보고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하는 것에는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각자 스스로에게 꼭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만약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복음이 들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해도 예수님께서 질타하셨던 외식주의자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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