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31-39)
한 가지 여러분에게 제가 묻겠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불평”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불평”이 많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여기고 체념하는 숙명론에 빠져있기 때문에 불평이 적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믿음과 헌신과 충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환난이 닥쳐올 때에 하나님, 제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라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하기가 쉽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불평과 불만”이 들어오면 “감사와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면 “구원의 확신과 영적인 능력”이 사라지는데, 이러한 “영적인 현상”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모든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감격과 찬송을 회복하여 재 헌신”할 수 있는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회복”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사랑입니다.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라는 궁극적인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 사랑을 우리에게 “증명”하셨는데, 29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아신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미리 정하셨다.”말씀하시며, 또한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30절에 보면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래 “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옷”을 벗겨주시고“의의 옷”을 입혀주셔서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의롭다 인쳐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갈 수 있도록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미래에 받을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일들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워필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정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련의 축복들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다섯 개 고리로 만든 황금사슬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를 묶는 “죄악의 쇠사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 피로 구속받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은총의 사슬로 붙드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들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시103: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아시고 나를 정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성도는,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교만하고, 세속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반드시 “주께서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사람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대상29:13-14절에서, 다윗은 성전을 짓기 위한 준비를 다 한 뒤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으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자신의 진면모를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릴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는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는 예수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요지동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고난가운데에서도 “천국의 소망과 상급”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그리스도인들은 “간섭받기 싫은 익명성을 즐기고 편리한 실용성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초지일관 주님을 향한 “믿음의 뚝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감사와 감격”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내 “영혼”이 깊이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의 세속화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꿀 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병들어 신음할 때에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행여나 불의의 사고로 자식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내가 대신 죽어 줄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식을 죽여서까지 라도 나는 그 일을 이루고 싶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게 만들고,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시며 부르짖던 소리마저 외면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위로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에 인색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광대하시고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절망하며 낙망할 때에, 이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얻어 내 삶속에 기적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이 해답이다.”는 책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여주면, 물의 결정체가 아름답게 형성되지만, 부정적이고 저주하는 말을 하게 되면 물의 결정체가 파괴되는 것을 발견했다.”
여러분, 말을 못하는 물도 이와 같다면, 우리의 삶과 영혼이 아름다운 결정체가 되기 위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감격”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남은 생애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지 못할 때, 초라해지고, 그 초라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초라함은 열등감으로 발전하고, 그 열등감은 교만으로, 때로는 미움과 시기와 원망으로 발전하여,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초라함과 쓸데없는 열등감에 빠져 불행해 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투명함과 질을 높여 여호와께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인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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