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으냐? (로마서 3:9-20)
지난 시간을 정리해 보면, 로마서 1장 후반부에서는 자기 욕망을 좇아 짐승처럼 사는 본능적인 인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2장 전체에서는 도덕적 인간의 세 부류, 즉 도덕을 부르짖는 비도덕주의자, 타락한 자기 양심만을 믿는 양심주의자, 형식만 강조하는 형식주의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9절은 “그러면 어떠냐 우리는 나으냐.”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멀리 보자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바울을 포함해 이 서신을 받아 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가깝게 보자면, 지구상에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더 가깝게는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저와 성도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대권을 놓고 서로 이전투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양보나 타협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하냐?”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여러분, 아내, 남편, 자식 앞에서 내 이기심을 죽이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곁에 있는 동료를, 나 자신보다 더 존중하고 우대해 주고 있습니까?
젊은 세대들은 비도덕적인 기성세대들을 쉽게 비판하고 매도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혹시 기성세대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 명예는 아닙니까?
젊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부 타락한 기성세대보다 죄지은 횟수가 조금 덜하거나 죄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9-1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떠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30대라고 해서 기성세대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20대나 30대나 40대나 50대나 영아부나 청소년부나 청년부나 장년부가 따 똑 같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가지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구구절절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5:48절의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만큼 우리도 온전하게 살라.”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손들 사람이 있습니까?
요13:3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라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겪으신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손들 사람이 있습니까?
또 주님께서 마22:39절에 보면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세끼손가락을 아끼는 만큼이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오로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소망이 없는 죄인이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바로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세계 사상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그가 쓴 “참회록”에 실린 우화에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맹수를 피하려 우물 속으로 들어가 넝쿨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물 밑바닥에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독사는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물 위에서는 맹수가 기라기고 있는데, 더 기막힌 것은 거 넝쿨의 위부분을 생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넝쿨은 자꾸 약해져 갑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언제 떨어질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하고 있던 일은 자기가 붙잡고 있는 넝쿨 줄기에서 떨어지는 벌꿀을 빨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꿀의 단맛 때문에 밑에 독사가 있다는 것, 위에 맹수가 있다는 것, 지금 줄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 줄에 달린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무엇을 간구했겠습니까?
“단물이 더 나오게 해달라는 것일 텐테...”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내 욕심, 내 소원, 내 뜻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탐욕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은 자신이 매달린 줄에서 나오는 단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먹겠다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그 단물을 더 이상 빨아먹을 수 없을 것이며 하늘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단물이 영원한 안식과 생명에 결코 비할 바 못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4:26절은 인간의 실상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물을 더 달라며 계속 기도하다가 노아의 홍수 때에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을 바로 인식할 때만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원자요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바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 입대 전에 어머님의 권유로 한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던 중에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어디를 가더라도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군대에서 성경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읽었고, 네베게이토 선교부에서 오래 동안 사역하신 좋은 목사님을 만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 신학교에 입학한 후, 성경의 시작 부분인 창세기를 읽던 중에 “저는 떳떳합니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구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갈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죄 많은 삶을 살았으니 하나님께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나 같은 죄인이 주님께 구원받고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을 위해 사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제가 얻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십니까?
진리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불의와 벗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올바른 길을 걸어갑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거짓을 꾀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고 성실합니다.
나태하거나 방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모두를 유익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덕이 되게 합니다.
우물 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물 밖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인도해 줍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살아 있는 진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어받아 진리를 위해 희생한다면,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후손들은 대를 거듭하며 진리의 열매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을 찢으며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 새로운 권능, 새로운 힘을 내려 주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승리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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