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그런즉 이 복이 (로마서 4:9)

Johnangel 2024. 9. 10. 09:27

그런즉 이 복이 (로마서 4:9)
                                              
한국갤럽조사 연구소가 우리나라를 포함해 18개 나라의 2만4천명에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행복도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18개 나라 가운데 꼴찌를 했습니다.
행복도 10점 만점에 한국 사람들은 5.3점 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국 사람의 마음 반쪽이 불행으로 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60-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보다 “행복하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행복은커녕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절대적으로 내 옆에 있는 것들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옆으로 오는 행복이 참된 복”이라고 착각하고, 잠시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합니다.
착각과 도취가 크면 클수록, 진실을 깨닫는 순간에 세상이 자기를 배신한 것처럼, 처절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위로부터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행복은 마음속에 차고 넘쳐 결국 밖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즉 행복은 옆으로부터 세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렇습니다.
그냥 복이라고 하지 않고 “이 복”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이란, 어떤 복입니까?
6절에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로가 없어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죄를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추상적 이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어떤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재의 힘, 즉 권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롬7:23절에서, 잠신의 몸속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힘을 보며 이렇게 한탄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다시 말해서 “죄는 우리를 사로잡고, 얽어매고 속박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어떻게 얽어매고 속박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식을 갖지 않게 합니다.
전혀 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듯이 죄에 대한 면역성이 갈러지고, 나중에는 죄를 즐기게까지 됩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 무딘 삶을 살다가 스스로 파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죄의식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죄의식을 갖기 마련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갑자기 벼락이 치면 대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1991년 필리핀에서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을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기자들이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웠느냐?”물었더니, 죽는다는 생각에 앞서 “하늘의 심판이 가장 두려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43:25절에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기억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하셨고, 시103:12절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를 멀리 옮겼다.”고 하셨고, 사1:18절에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죄의식에서 자유를 얻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양심의 찔림을 통해 죄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죄를 지으면서부터입니다.
따라서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요한복음 3장에서 “영생”이라는 단어를 네 번, 같은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두 번, “하늘”을 네 번, 모두 열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만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을 때, 결국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고, 죽음의 공포 속에 갇힌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공포는, 생명과 단절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아무런 의미 없이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일방적으로 연장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냐하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영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밤에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한 가지 “내일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만약 내일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잠이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12:6-7절을 보면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다음 날이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 천사가 와서 옆구리 쳐 깨울 정도로 잠이 든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처럼 죽음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럴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속에 있을 때, 그 얼굴이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목을 붙잡고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어찌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자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내 생각과 어긋나는 일이 일어난다.”해도, 내 생각보다 더 높은 뜻과 계획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므로, 더 아름답고 선한 방향으로 나는 친히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23: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했고, 시23:4절에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시면 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주님 자체가 넘치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어주기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10년 동안 쫓아다닐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신이 입을 수 있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 같은 삶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