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믿은 바 (로마서 4:10-17)
바울의 질문은 10절에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은총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언제 의로 여김 받았는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였는지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였는지, 바울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할례는 오늘날의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꿔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이미 결단한 때였는지, 아니면 그러한 결단이 없었던 때였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자답하기를 “무할례시” 즉 하례를 받지 않았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였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는 75세 때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24년 전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면 아브라함은 그 은총을 절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던 사람이 아니라 하란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임했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은총을 믿은 것입니다.
이 사실이 대단이 중요합니다.
기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 애씀,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면, 바른 믿음이 세워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헝클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할례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예수만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자신이 형편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므로, 앞으로 하나님만 믿겠다는 믿음의 증표로 할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치 결혼식 때 신랑 신부가 서로 금반지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나 같은 죄인을 일방적으로 불러주시고 의롭다 하주셨으니, 이제부터 정말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갈겠습니다.”라고 결단하는 예식입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은 그저 할례를 받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 보여 준 믿음을 본 받아 삶으로 증명해 가는 것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제기 되는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왜 삶의 모습들은 다 다르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게 성취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일정도로 위력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매일 매일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란 “삶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상속자로 세워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삶을 살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습호라기스”는 말로 조건부 약속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빠가 아들에게 숙제를 끝내면 사탕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에팡겔리아”로 일방적 약속이요, 유언적 약속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는 유언에는 조건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약속은 한 번 맺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으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이 “에팡겔리아”입니다.
14-16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이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낳고, 믿음은 용서를 낳고, 용서는 구원을 낳고, 구원은 새로운 결단을 낳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에팡겔리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은혜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에팡겔리아”가 되게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우리의 본으로 세워 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과거를 지녔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으면, 우리도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12: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입속에서만 맴돈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에서만 관념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삶으로 드러났습니다.
창12:4절에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라고 증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창22:1-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사건에 대하여, 히11: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 아들을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말의 믿음이 아니라 삶의 믿음, 즉 삶을 드리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의 대상은 아브라함이 아닌 그의 자녀였습니다.
따라서 그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시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요, 만약 하나님께서 이삭을 데려가신다면 분명히 다른 자녀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창22:16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약속해 주셨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창12:2절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는데, 창22:18절에서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자녀도 복이 되는 “에팡겔리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일이 창대해자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실패를 경험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열 번 백 번 망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뚝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의 삶을 내맡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실패자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음에도 그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롯이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얻었으나, 자신의 삶을 드리지 못해 결국 인생을 수치스럽게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은총 앞에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응답하느냐에 따라 수년 후 우리 각자의 삶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 속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사람은 창대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사람은 계속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은총에 여러분의 삶 전부를 의탁하는 참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삶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에팡겔리아”를 날마다 목격하고 맛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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