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바라고 믿었으니 (로마서 4:18-22)

Johnangel 2024. 10. 1. 07:32

바라고 믿었으니 (로마서 4:18-22)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신 다윗은 시골 베들레헴의 양치기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 근체에 살던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쓰셨던 사람들이 결핍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부족한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뭔가 부족하고 결핍된 처지에 놓여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비전을 가질 수 있는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1. 비전은 야망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야망은 그 속석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망은 사람을 헤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야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그 속성상 사랑이요, 빛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 비전의 목적입니다.
 
2. 비전은 꿈이 아닙니다.

전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 여사는 “비전이라는 것은 실현된다는 점에서 꿈과 구별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꿈이란 잠을 자면서 꾸는 것이기에, 꿈이 멋지고 스케일이 웅장해도 문자 그대로 꿈으로 긑납니다.
그래서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땀 흘리며 애쓰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꿈속으로 도피해 버립니다.
그러나 비전은 반드시 실현됨을 전제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합니다.
누구보다도 땀 흘리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비전이란 반드시 실현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사람의 내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비전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따라서 비전은 그것을 지닌 당사자를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헤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밝고 건전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가지고 비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도구로 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곧 “비전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비전입니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아들도 없던 사람이 어떻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비전을 갖는다는 것입니까?
주책이나 노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비전이 야망이나 꿈과 구별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창17:4절)
만약 이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내부에서 온 것이었다면, 아브라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추하고 흉한 노인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 비전 또한 추악한 야망이나 호망한 꿈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비전이 비전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비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상 야망이고 꿈입니다.
이것은 쇠에 생기는 녹처럼,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상하게 만듭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고 했고, 19절에서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20절에 보면 “믿음으로 견고하여 져서”라고 했고, 20절에서는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구체화될 때에만 믿음입니다.
창15:6절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약2:21-2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실제로 제단에 올려놓고 번제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행함이 믿음보다 앞서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행함이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삶 속에서 이루어지라고 믿는다면, 그 비전을 위해 자신이 행할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형제들도 요셉에게 창37:19절에 보면 “꿈꾸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정말 꿈꾸는 사람이었다면,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께로 받은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매일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에 자신의 삶을 건 결과, 총리가 되고 또 한 민족이 구원받는 역사로 비전이 성취된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비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인간의 야망이나 꿈과 구별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비가 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삭이 생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꿈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추상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비전의 열매가 결실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비전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실천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때,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열매를 맺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의 모든 열매는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그 열매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훨씬 크고 아름답습니다.

아브라함이 비전을 얻어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자,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열매를 내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삭에게서 난 손자 에서와 야곱, 이 세 사람을 보고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며 무엇을 보고 있겠습니까?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한다 해도 그것을 교통신호로 삼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시듯이, 다윗을 쓰시듯이, 바울을 쓰시듯이 우리는 당신의 비전의 도구로 쓰시고, 우리를 통해 여러 민족을 바로 세워나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