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4:23-25)
23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는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약속, 곧 “에팡겔리아”를 이루어 주신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여 믿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에팡겔리아” 즉 “하나님의 약속 된 축복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려 주기위해, 그 본보기로 아브라함을 세우셨기 때문에,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성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본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축복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영원히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 즉,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한 가지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격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을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즉 “예수그리스도께 삶을 의탁한다.”는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 인격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에 동화되기 시작하여, 묻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격에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이 배어 있지 않다면, 자기 삶을 주님께 의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롬5: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예수그리스도께 맡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팡겔리아”가 “화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화평의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요14:17절을 읽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안은 모두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첫째는, 평화는 외적인 평화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영원하지 못하고 언제든지 쉽게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주어지는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내적인 평화입니다.
내적인 평화는 어떠한 외적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샬롬”이기 때문입니다.
삼하12장에서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얻고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평화” 즉 “샬롬”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평화라고 해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덧입혀 주셨는데, 그 이름이 바로 “여디디야”입니다.
“여디디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지 않으면, 절대로 평화란 없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때, 우리에게 참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여디디야”가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인격을 주님의 인격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롬5:1절에서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에서 “누리자”는 것은 “즐기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 인격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래서 위로부터 화평이라는 “에팡겔리아”가 삶 속에 열매를 맺었다면, 이것은 두 가지 사실로 증명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평이 나와서,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나타납니다.
창21:25-31절에 보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우물은 생명이자, 재산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문제를 평화로 해결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아비멜렉이 찾아왔을 때, 보상금을 받는 대신 오히려 값을 치르며, 우물을 자신의 것으로 확정하는 맹세를 하게 합니다.
또한 창26:19-22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그랄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우물을 빼앗겼는데, 그들과 다투지 않고,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분쟁이 발생하지 않아, 그 이름을 “넓은 장소”라는 뜻의 “그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세 번째, 우물은 이전 우물보다 물이 더 나왔으므로, 하나님의 “에팡겔리아”였습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서를 해도 하나님의 화평이 마음속에 없으면, 입으로만 용서하고, 속으로는 더 증오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내 안에 있을 때에만, 내가 용서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책임지시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평이, 나 자신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내가 나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나의 노예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모르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열등감을 해결하지 못하면,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폭력적이 되고, 거칠어집니다.
폭력은 반드시 주먹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거친 생각, 거친 말, 거친 심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욕심과 열등감에 이지러진 자신과의 불화를 끊어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이웃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도, 마5:1-10절의 팔복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마음에 형화가 스며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100% 당신의 인격을 하나님께 맡기심으로써,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화평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의 인격에, 우리의 인격을 모조리 다 맡기십시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화평의 사람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삶이 새로운 삶이 되도록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로마서 5:2) (0) | 2024.11.12 |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창세기 12:1-5) (5) | 2024.10.23 |
바라고 믿었으니 (로마서 4:18-22) (2) | 2024.10.01 |
그가 믿은 바 (로마서 4:10-17) (1) | 2024.09.28 |
불가능을 넘어서려면 (마가복음 9:17-29) (2) | 202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