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로마서 5:2)

Johnangel 2024. 11. 12. 16:33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로마서 5:2)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화평을 누릴 수 있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 화평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은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므로 은혜의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성경에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로운”말입니다.

눅4:21-22절을 보면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은혜로운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은혜로운”이라는 단어를, 문법적으로 직역하면 “은혜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왠지 모르게 말씀이 자꾸 재미있게 여겨진다거나, 신기하게도 말씀의 의미에 눈이 뜨인다거나, 예전보다 집중해서 듣는 귀가 생긴 것을 체험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게 되면, 말씀이 나를 변화시켜 내 삶이 예전보다 더 진지해지고, 더 거룩해지고, 더 실재가 되어 가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고, 삶을 통해서 말씀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눅2: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 “사랑”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흠이 없는 거울이라 할지라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반드시 빛이 있을 때에만, 무엇이든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로부터 사랑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사랑은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체 내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절대로 이타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습3:17절을 읽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말은 “내가 주님을 배신해도, 내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심지어는 내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삶을 살았을 때에도, 주님께서 내 삶 속에 사랑으로 계셔왔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주님을 끊임없이 배신한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잠잠히”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바로 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이 나를 지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지배하면, 삶의 방식과 모습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 찬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증오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상대가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기도합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바꾸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부부지간에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바뀌게 해 달라.”고,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남편이 바뀌는 것보다, 내 아내가 바뀌는 것보다, 내 친구가 바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나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드러나야 할 기도는 “나 자신에게 위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아 내 속에 사랑의 자리가 마련되면, 부딪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부딪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감싸 안습니다.

 

셋째, “칭송”입니다.

행2:47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서 “칭송”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칭찬과 격려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기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잊고 살아갈 때는, 스스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말씀을 펴놓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썩고, 어둡고, 흉측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격려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넷째, “마음”입니다.

행24:27절에 보면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마음”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2:5-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종의 마음” 즉 “겸손한 마음”입니다.

 

잠16: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이야기해 보면, 그 사람이 교만한지, 겸손한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교만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따라서 “나의 교만함을 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교만함을 멋이나 애교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얻고,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면, 더 낮아지고 겸손해 지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섯째, “기쁨”입니다.

빌1:7절에는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기쁨”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기뻐하지 못할 일이 많은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전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받아 주어 하루 세 끼만이라도 해결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의 옷을 갈아입히고, 가죽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요,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니 함께 즐기고 기뻐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쁨은, 탕자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고스란히 전이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화평을 누리고, 은혜 속에 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맛이요, 멋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격려하심으로, 기쁨으로, 이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