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창세기 12:1-5)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입체적이며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평면에만 갇혀 있는 것 아니라 유기적이고 통전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선결되어야 할 점은 “창조하신 구조를 따라 본질과 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본질”과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구조”입니다.
믿음은 물론 순종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말씀을 받으면,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해서 복을 받자”라는, 사람들의 “의도”는 좋지만 “하나님 마음과 뜻”은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12:1-5절에서 “내가 하나님 말씀 속으로 들어갈 때”는, 먼저 창11장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을 보고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는 강력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따라가다가, 그는 지체하여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바로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지만, 때로는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시며, 형편없는 우리를 인도하셔서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우리의 완전한 믿음의 모델”로 세우기보다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기 원하십니다.
물론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은 훌륭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인간이기에 연약한 부분도 있었고, 믿음이 흔들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을 모델”로 삼기 위하여, 그를 포장하고 높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시고 아브라함의 약한 점”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신실할 때도 있고, 연약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이 “아브라함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을 믿지 말고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흔들리고 의심하는 우리들에게, 때에 따라 은혜를 내려주시고, 끝까지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직 그 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야 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같지만 “우리 현실의 실정에 급급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관계없이 성경”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어느 면에서는, 우리의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말씀이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이 더욱 우선”되어야합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내게 전해져야 “우리의 삶과 현실 속에서 말씀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인본주의, 경영적 차원, 실용주의 관점의 성경관이나 설교에 젖어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나의 좋은 생각이나 사상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읽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야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는 단 1%도 개입되지 않은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이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느끼고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너무 커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인간의 말씀이나 노력을 하는 여부에 따라 은혜의 양이 달라진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키거나 은혜의 통로”를 좁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중심의 열심과 헌신적인 종교적 행위, 경건, 자기의 선,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폭포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작은 분수”로 제한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과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서만 국한된다면 “폭포가 아닌 분수”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분수는 폭포에 비해 품어져 나오는 물의 양”도 적을 뿐만 아니라, 전원이 끊어지거나, 모터가 망가지거나, 수원이 고갈되면, 분수는 더 이상 물을 뿜어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제한 받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를 잘했나? 예배를 잘 드렸나?”하는 것처럼 “잘했는가? 못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울림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고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화”와 “성숙”은 함께 있는데, “성숙”이라는 것은 반드시 “변화”를 수반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키가 크고, 지혜가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믿음이 성장해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은, 모두 “변화에 의해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는데도 “신앙과 삶의 변화가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외부에서 무엇인가 들어오면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파동”으로 이어지고, 그 “파동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특히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을 통한 움직임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신앙을 성숙”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되는 요소들은 “느낌과 직감, 인지, 혹은 앎, 깨달음, 다짐과 결단, 적용과 실천,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하나하나가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데, 분명히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나 “다짐과 결단”도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한 가지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 삶에서 성숙과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와 고린도 도시의 이야기는 지금도 같습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미디어들 등, 각종 정보들 속에는 많은 가치관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우리가 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적 가치관”으로 물들어 갑니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을 구축”하지 못하면 “세상의 가치관이 역으로 교회와 가정과 다음세대”에 들어오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 가치관을 구축”하지 못하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기독교 가치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절대로 구축”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좋은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치관”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내 자신은 물론 가정공동체와 교회공동체”에 “기독교가치관을 구축”하여 이 지역을 변화시키고, 형제들 교회에 도전을 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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