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9-11)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죄에 대한 양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을 워낙 자주 쓰다 보니, 이 말이 더 이상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바울이 살던 시절에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말로 표현하심으로써“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라는 단어는, 대단히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원수지간은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 무조건 서로 죽여야 하는 관계로서 용서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자식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그 자식의 자식이 다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복수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지간은, 쌍방이 엇비슷한 위치에 있을 때 성립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한쪽이 월등하게 우월한 입장에 있을 때는 “원수지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보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원수라고 여기신다면, 우리 인간이 고스란히 멸망 받아야 할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 원수가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와 벗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히려 영원토록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에서 이처럼 자녀가 되는 관계로 바뀐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던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삼아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믿기 힘든 복음이자, 믿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1절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복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여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증명되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구호나 관념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한 구체적인 행위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관념이나 구호로서가 아닌 우리의 삶으로 확정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롬5:1-4절은 네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화평을 누리는 삶, 둘째는, 은혜를 누리는 삶,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넷째는, 환난 중에서 소망을 완성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때는 모두가 다 거룩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진위는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평화를 얻은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평화가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내가 “평화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최면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망한 신비주의일 따름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얻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가 정말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완성시켜 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내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긋나고 부패하게 되면, 현실도피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원수의 관계가 풀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즐거움을 계속 영위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이중적인 삶을 탈피할 수 없습니다.
“즐거워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평화를 누리는 삶, 은혜를 누리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환난 중에서 소망을 완성하는 삶”입니다.
위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네 가지 삶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자기 포기와 자기 부인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집안 일로 이견이 생겼다고 할 때, 아들이 자기 소신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집안이 든든히 서므로 아버지의 말에 따른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부인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으며 토론자로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토론자가 아니라, 대화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인격을 배우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난 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와 영광과 소망이 삶 속에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는데,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날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죽음입니까? 말씀 앞에서 죽음입니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죽으면, 남는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평화의 말씀, 은혜의 말씀, 영광의 말씀, 소망의 말씀, 부활의 말씀”입니다.
2.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입니다.
큰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갈채가 따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 갈채가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갈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갈채는 절대 영원하지 못하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작은 일에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지만, 사람의 갈채가 없는 대신 하나님의 갈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이, 여러분에게 위로부터 평화와 은혜와 영광과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 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잘 것 없고 유한한 인생이지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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