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1-11)
로마서 5장의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6장의 주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즉 “거룩한 삶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법 앞에,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내 죄가 인식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리려면 죄를 더 지어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은 그 대답을, 2절 상반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은혜를 더 얻으려면 죄를 지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틀린 가설입니다.
가령 “부모가 죽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식이 부모 사랑을 알기 위해 부모님이 하루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속에 거할 수 없는 이유를, 2절 하반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죄에 대해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더 짓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근거로, 바울은 “세례”를 언급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옛 삶이 청산 된 이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과거의 삶이 정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4절에 있는 “장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세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옛 삶에서 떠난 사람들, 즉, 옛 자아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은 “장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거듭난 것이 완전한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옛 자아가 죽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만 가중되고, 부활은 그만큼 더 늦어질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겨 “장사”지내신 뒤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새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옛날의 내가 완전히 “장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에서, 마16:24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온전히 죽으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어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결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고후5:17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볼 때 “새로운 피조물, 새 것”이라는 말에, 시선이 빨리 갑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 지나갔으니”하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과거 완료형으로 “과거를 흘려보내지 않으면 절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삶이 장사 지낸 바 되었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일깨워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10:1-2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 세례를 받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간 것을, 세례 받은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홍해에 발을 내디딜 때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작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간 뒤에는 홍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합쳐졌습니다.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노예의 삶은 고통과 어둠의 삶인데, 이것이 청산되었다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홍해를 건너감으로 노예생활이 완전하게 장사되었다.”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몸은 애굽에서 나왔어도,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애굽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결국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써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그 자체보다 “세례의 정신을 올바르게 지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온전히 “장사”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5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죽음으로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서 “부활에 있어서도 주님과 연합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부활이 없다면, 결코 우리를 “장사”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아직까지 장사지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연합”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나이티드(united)라는 의미로서, 즉 흡수되는 것입니다.
물속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는다고 해봅시다.
물과 설탕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물속에 설탕을 넣는 순간, 설탕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속에 용해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물이 어디를 가든지 설탕도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접붙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앞에 포도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합시다.
이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부실한 열매를 맺는 가지를 잘라버리고, 새 가지를 접붙여야 합니다.
부실한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붙어 있는 한, 계속해서 나쁜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장사되면 즉, 죽음으로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께 접붙임이 되면 “주님의 생명과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세례 정신은, 주님께 접붙임을 받아 주님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기를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이 “세례” 정신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갈2:2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처럼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어떤 죄가 나를 유혹하든지, 죄에 대해 나를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려는 나를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장사지낸다.”는 것은, 말씀에 나를 못박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 앞에서, 나를 부정하고 죽이면, 이후 모든 것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은 “우선 나 자신을 죽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하시리라”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받은 이후의 삶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붙잡고 담대히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된 삶과 영생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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