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다시 살아난 자같이 (로마서 6:12-14)

Johnangel 2025. 4. 7. 17:48

다시 살아난 자같이 (로마서 6:12-14)

                                           

우리는 지난 시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황의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세상과 죄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말씀에 못박아 장사”지내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께 접붙임을 받음으로 새 생명을 얻고 삶 속에서 주님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롬6:1-11절이 모두 다 중요한 구절이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할 두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3절에서 나오는 “알지 못하느냐”입니다.

이것은 “알고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11절에 나오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는 “간주하다. 단정하다. 인정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라고 매 순간 간주하고 단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반드시 결단으로 이어져,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 결단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내 안에서 관념으로 머물다 소멸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떤 순간에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죄에 대해 죽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산자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성화를 이루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다시 말해서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성화의 삶은 무엇으로 시작됩니까?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욕망을 물리치지 못하면, 욕망이 나에게 왕 노릇합니다.

욕망이 나의 왕이 되면, 그 왕 앞에서 나를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가 다시 나를 지배합니다.

한번 욕망에 굴복하면, 그 다음부터는 죄는 힘이 있어, 그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체의 욕망을 아무리 아름답게 가꾸어 봐야 결국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오는 영원한 삶과 참된 기쁨은, 욕망을 채울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버릴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반대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욕망의 문제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언제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늘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인도하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욕망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이것은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할까요?

13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지체”입니다.

즉, 우리의 사지백체 중 “어느 부분도 죄의 무기가 되지 않게 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지백체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죄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욕망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른 지체마저도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눈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몸 전체가 죄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마18:9절에서 예수님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비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상태를 깊이 들여다보고 각별히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 하반절에서 “욕망을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제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이미 옛사람이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새 생명을 경험한 사람답게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드리면, 헌신은 당연히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만 해서는, 생명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다시 보면,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림과 더불어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지체 중 어떤 부분도 죄의 무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사지백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의롭게 쓰여 져야 합니다.

만일 조금의 시간이라도 불의하게 쓰여 지면, 그 시간 동안 우리의 지체도 불의하게 쓰여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지체를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쓸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곧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고 “지체가 죄의 무기”가 되지 않으며 “옛 삶을 청산하고 자신을 하나님께”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모든 시간과 지체를, 어떻게 의롭게 쓸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욕망의 노예”가 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삶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위해 시간과 지체를 써나가면, 삶의 성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중요한 단어 세 가지는 3절의 “알지 못하느냐?” 11절의 “여길지어다.” 13절의 “드리라.”입니다.

이 세 단어는, 각각 “깨달음, 결단, 실천”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정리하고, 로마서 7장으로 넘어가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 이루라.”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만 주시고 “너희 스스로 법을 지킬 때에만 너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중도 탈락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찢기시고, 보혈을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 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조셉 스웨인” 목사는 자신이 작사한 찬송가에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찬송은 입으로만 드리는 찬송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으로 응답 드리는 찬송”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다 하고도 더 해드리지 못해 아쉬운 마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그 사랑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으십시다.

이 사랑 앞에 결단하십시다.

지금부터 우리의 삶으로 “주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십시다.

그러면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날마다 맛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