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절(부활주일) 설교원고 -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23)

Johnangel 2017. 4. 21. 15:58

부활절(부활주일) 설교원고 -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23)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날입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종교는 영생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이 없는 종교는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저녁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이미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뛰어다니며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9절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문들을 닫았다.”고 복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중삼중으로 문들을 겹겹이 걸어 잠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잠근 것은 다락방문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억이 생각나지 않았고, 주어진 상황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장차 우리가 부활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과 눈과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눅24:37절에 보면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했지, 쉽게 표현하면 “귀신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제자들이 듣고 싶은 말씀입니까?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 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기쁘기도 했겠지만, 한편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때,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공통에 신음하며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마음껏 목 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도,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배신자인 제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21절에서 재차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복되는 이 평강의 축복은, 단순한 인사나 형식적인 위로가 아니라,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오늘 누려야 할 축복이요,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26절에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은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영적인 충만함과 정신적인 평안과 육체적인 건강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평강”이라는 한마디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 우리 인간이 평안을 잃은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낙원을 우리 인간의 죄가 파괴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은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인류 역사는, 인간의 탐욕과 끝없는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죄는 개인의 심령의 평화를 파괴하고, 사회의 평화를 파괴합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오늘 본문은 평강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는, 이 말씀의 “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태초에 주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니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창세기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몸은, 흙의 요소가 있고, 생기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기의 요소” 즉 예수그리스도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너희가 육체가 됨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호흡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흙덩이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흙만 남은 우리 인간들의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부활절 이 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체만 남은 생기가 없는 우리에게, 창조주의 숨결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용서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유죄판결이 내려진 우리의 삶이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무죄가 선언되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도 미워할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담당하시고 “의롭다.”선언해 주셨으니, 우리 자신에게 먼저 “나는 소중하다,”라고 선언하십시오.

“나 OOO은 너 OOO을 사랑하노라.”

“나 OOO은 너 OOO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그리고 소중한 여러분의 가족,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선언하십시오.

이제 우리에게는 미워할 자유도, 권세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1:12절의 말씀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 모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부활절 이 아침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고전15: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9절에 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니라.”고 같은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이야말로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갈림길입니다.

좌절과 희망의 갈림길이요, 죽음과 영생의 갈림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돌아섰던 제자들이, 복음 증거에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던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은 곧 부활신앙이었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는 곧 부활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행3:1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이 아침 여러분에게 평강이 넘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