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절(부활주일) 설교원고 - 부활절 그 이후 우리의 삶 (요한복음 20:19-23)

Johnangel 2018. 3. 26. 20:04

부활절(부활주일) 설교원고 - 부활절 그 이후 우리의 삶 (요한복음 20:19-23)

 

                                          

부활하신 예수님은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의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0명의 제자들을 만나신 이야기와 11명의 제자들을 한꺼번에 만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미 신령한 몸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원하는 자들만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주님이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절기를 보낼 때에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기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부활주일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기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의 완성은 부활 그 자체에만 있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께 믿음의 초점과 삶의 무게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시고,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심으로, 오직 주님만이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고, 참된 믿음의 대상이시며 기쁨과 소망이심을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먼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의 마음속에 세상이 해석할 수 없는 평강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22절에서 “사역의 역동성과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고 이끌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을 약속해 주셨고, 이 약속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통해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는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예외 없이 죄 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국가와 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국가나 단체는 단 한곳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복음을 통한 사죄의 은총을 선포할 수 있도록 세상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교회 안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행1:8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를 불러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와 구원받은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모이는 교회”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는 “흩어지는 교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균형을 가진 교회만이 “역동적인 교회, 영향력 있는 교회”로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균형 잡힌 교회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갈 뿐 아니라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이 없는 구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들을 자 없는 복음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세상을 향해 스스로 쌓아올린 보이지 않는 우리 인간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고, 성도는 성도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삶의 거듭남과 의식의 거듭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으로 나아갈 때,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도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가정과 직장과 일터로 파송된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각하는 만큼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이 사명을 깨닫는 만큼 교회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믿음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1. 파송 받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 성도는 마땅히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주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4: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송 받은 자는 파송하는 자의 생각과 뜻을 앞세워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자기가 속한 현장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현장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죄악 된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의 믿음은 지킬 수 있을지라도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열매는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대표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것은 전교회를 파송하는 대표성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도들은 전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4가지 표지는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입니다.

그중에 사도성은 “교회가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사도성은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성도와 교회가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해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고현교회의 두 가지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대표성을 가질 때, 익산의 영혼들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대표성을 깨닫고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우리도 대표자의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익산과 이 나라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20여 년 간 치열한 의회활동을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지역주민들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산다.”는 대표의식을 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귀한 삶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대표성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신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이 결단에 우리가 순종하면,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지역과 이 민족위에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