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종려주일) 설교원고 - 골고다 언덕 세 개의 십자가 (누가복음 23:33-43)
“골고다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유대인들의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이었고 “예수와 흉악범 두 사람을 처단한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은 구경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몰려 왔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정인 유월절 명절에 두 죄수와 함께 예수님을 처형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이 영웅시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흉악범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이런 부류라고 알리고 싶었던 그들의 잔꾀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성취를 가져왔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악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고 악인들과 함께 매달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성취와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편이든 우편이든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좌우편의 흉악범 두 사람은 “온 인류를 상징하는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흉악범들로서, 좌편에 서든, 우편에 서든, 어느 한쪽에 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의 행악자가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는 걸 보니 “메시야는 아닌가 보다.”생각하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이 한편의 행악자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지만,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며, 먼저 욕하는 행악자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이 행악자는 어떻게 주님을 그 어려운 순간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는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과는 다른 점을 발견하고, 아마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분이야 말로 메시야구나.”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오른편 강도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십자가는 멸망 받을 자와 구원 얻을 자가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분기점으로 구원자와 멸망자가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는 분리의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영과 육이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죄와 구원이 분리되어집니다.
의와 율법이, 옛사람과 새사람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세우고, 천당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구원과 심판이 나누어집니다.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지고, 형벌과 상급이 분리되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학벌로 갈라지는 곳도, 선행으로 갈라지는 곳도, 미모로 갈라지는 곳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십자가의 고난이 나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임을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그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가는 곳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이 305장의 찬송을 만든 사람은 "존 뉴턴" 목사님입니다.
이분이 4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평생토록 그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과제가 있었는데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유럽의 노예시장에 팔았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하면서도 “나처럼 끔찍한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고민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죄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울면서 시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305장의 찬송이 된 것입니다.
그가 82살이 되어 임종하는 순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세 번 놀라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전혀 생각 밖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둘째,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 노예 상인이었던 끔찍한 존 뉴톤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마27:44절과 막15:32절에 보면 “두 행악자가 함께 예수를 욕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한편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했고, 한편 행악자는 회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과 행악자들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는 양편 행악자가 똑같이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손에 못을 박는 사람들, 조롱하는 사람들, 침 뱉은 사람들, 쓴 포도주를 입에 넣는 사람들,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나그네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라고, 용서하는 기도를 할 때에 “아마 오른편 행악자는 회개를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무튼 그는 지금 회개를 하고, 예수그리스도께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습니까?
1.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40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회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에게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도,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참으로 진실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2.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했습니다.
41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당연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올 때마다, 세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고, 숨길 수 있었고, 속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 설 때마다, 감출 수도 덮을 수도, 숨길수도 속일 수도 없기에 하나님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사오니 주님을 찬송합니다.”하고, 주님 앞에 올 때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나와야 합니다.
3. 그는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41절후반절에 보면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변호해야 된다면 누가 변호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이분은 의로운 분이십니다.”라고,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아니면 “울고 있던 여인들과 마리아 어머니만이라도 내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리는 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고 있고, 나그네들마저 비웃고 있고, 유대인들과 관원들마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아니요. 이 사람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구세주이십니다.”라고, 변호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고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고난과 핍박의 현장에서, 네가 나를 시인하고 인정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도 너를 인정하고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부인하면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서 너를 부인 할 것이다. 나도 너를 인정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십니다.
4.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사람은 “그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지 “구원해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놀라운 응답을 받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진가를 알려면, 위기상황에 부딪혀보면 압니다.
지금 오른편 강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신뢰를 보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도시락 하나로 오천명이 먹고, 죽은 자가 살아날 때는,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자기와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함께 숨을 몰아쉬며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낙원이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신앙고백을 기쁘게 받으신 예수님, 그는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가 되었고, 천국에 함께 들어간 최초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른편 강도로부터 배워야할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어떤 제자도 아니었고, 울고 따르던 여인들도 아니었고,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오른편 강도가 최초의 천국 입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신앙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장소, 모든 사건에서, 골고다 언덕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왼편의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요, 멸망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오른편의 십자가는 영생의 십자가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만나 그 짧은 시간을, 최고, 최선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되새기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특별새벽기도회에, 당신 인생의 주사위를 예수님께 던지고 최고의 기회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른편의 행악자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승리를 맛보리라. 네가 나와 함께 축복의 길을 걸어가리라. 네가 나와 함께 영광스런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의 축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난주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주간 설교원고 - 예수 그리스도 피의 능력 (히브리서 9:11-22) (0) | 2018.03.26 |
---|---|
고난주간 설교원고 -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갈라디아서 6:14) (0) | 2018.03.26 |
고난주간 설교원고 - 여섯째 날 (마태복음 27:57-66) (0) | 2017.05.06 |
고난주간 설교원고 - 다섯째 날 (누가복음 23:26-49) (0) | 2017.05.06 |
고난주간 설교원고 - 넷째 날 (마태복음 26:17-30) (0) | 2017.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