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6:8-15)

Johnangel 2022. 5. 26. 11:56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6:8-15)

 

초대예루살렘교회에 일곱집사가 선택되고, 그 일곱집사 가운데 대표로 스데반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기사를 길게 다루면서, 그의 설교가 베드로의 설교에 버금가는, 비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이 회당은, 평소에 유대인들이 모여서 율법공부를 하거나 간단한 예배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역마다 만들어 놓은 집합장소입니다.

 

당시 교인들은 예루살렘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성전에서 열리는 모임이 전체집회의 성격이라면, 회당에서 열리는 모임은 성전모임 후, 흩어진 사람들의 소그룹 모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는 사도들이, 회당에서는 평신도지도자들이 말씀을 가르쳤는데, 스데반집사는 평신도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자유민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구레네인, 안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소아시아에서 온 사람들”과, 연결된 단어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한 때, 로마제국의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자유민이란, 그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동북부와 아시아 등 사방에서, 온 교포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앞서 선출된 일곱집사들의 이름을 보면, 전부 교포헬라문화권 유대인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포유대인이었던 스데반집사도, 예루살렘 본토유대인보다는,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는 교포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하고, 말씀 증거와 이적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1. 스데반의 얼굴에 가득한 영광입니다.

 

스데반집사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드디어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회당에서 일어났고, 결국 그를 죽음의 자리까지 몰고 가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유대인의 대법원인 산헤드린공회에 기소하여, 그를 재판석에 세웁니다.

 

스데반집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구실을 보면, 예수님의 재판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닮았는지 모릅니다.

“성전을 헐라고 했다. 또 율법이 이제 필요 없다며 율법의 무용론을 제기했다”는, 거짓송사를 하고, 거짓증인들을 끌어들여 그가 하지 않은 말까지 증언하게 했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예수님이 재판받았던 바로 그 자리에 섰으며, 기소이유도, 거짓증인이 등장하는 점도, 예수님의 경우와 똑같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러한 예가 있습니다.

출34:29-30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지금 그런 사람을 우리 가운데서, 찾을 수 있을까요?

스데반집사를 보며, 깊이 묵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6장 초두에 보면, 스데반을 집사로 선출하기에 앞서 사도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자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거기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5절에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고, 8절에서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7:55절에서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되어 있는 등, 스데반에 대해 네 번이나 “충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충만”이라는 말이 “지혜가 충만하다. 믿음이 충만하다. 은혜가 충만하다. 권능이 충만하다.”는, 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믿음이 탁월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있는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받은 은혜가 남다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가 주관합니까?

성령이 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십니다.

스데반이 집사로 안수받은 것도 성령충만 때문이었고, 큰 기사와 이적을 행한 것도 성령충만 때문이었고, 회당에서 논쟁을 벌일 때,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능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지혜와 능력으로 맞섰던 것도, 성령충만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던 것도, 핍박을 받아 순교하게 된 것도, 성령 충만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하나하나 풀어 낼 열쇠는, 오직 “성령 충만”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대적하고 있는 이 세상, 정복해야할 이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무엇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죄와 마귀의 능력으로 충만하고, 육신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충만합니다.

세상은 절대 비어 있는, 법이 없습니다.

모두 다 이런 것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자신도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나는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지 못할까?”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와 같은 경험이, 우리들 삶속에 틈틈이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한지, 성령충만하지 않은지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얼마나 나를 강하게 사로잡고 일하시는지, 성령이 내 안에서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역사하시는지, 성령이 얼마만큼 나를 통해 사랑의 수고를 하게 하시는지, 성령이 얼마만큼 나에게 찬양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19기초 미국에서 유명한 부흥운동을 일으킨 “찰스 피니”목사님은, 성령충만에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못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르는 현대교회는 분명히 병든 교회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성령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살인은 죄인 줄 알면서 왜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은 죄인 줄 모르는가?”

 

첫째, 성령충만한 사람은 별난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물론이지만, 성령충만하지 못한 성도들이 볼 때도 별나게 보입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끌려서 살기보다는, 자기 욕심에 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성령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받는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26:29절에 보면,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을 때, 쇠사슬을 건 손목을 높이 쳐들면서 “베스도 각하여, 이 손목에 맨 쇠고랑 외에는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때,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제 지식이 너무 많아서 미쳤도다.”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각하여,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미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스데반집사의 경우도,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적당히 믿던 그리스도인들, 또는 예수를 모르는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분명히 별난 사람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둘째, 성령충만한 사람은 교회와 세상을 보면서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죄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볼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예수를 제대로 모르고 성령충만도 모르는 사람을 볼 때, 바울처럼 마음속에 밤낮없이 고통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스데반에게 이런 고통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를 몰라서 날마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불쌍한 영혼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과격하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죄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천국의 평화를 맛봅니다.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던 스데반의 경우를 보십시오.

아마 그는 “전 세계가 자신을 향해 대적한다.”할지라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놓았다면, 그 물을 누가 쓰겠습니까?

물통에 물을 담아 놓은 사람이 그 물을 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충만하면, 그 사람을 누가 쓰겠습니까?

당연히 성령충만하게 해주신 분이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하게 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면,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신학교를 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붙잡아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 그런 성령충만이 좋기는 해도 나는 그렇게 될까 겁이 나서 성경공부 열심히 못하겠어요. 그렇게 푹 빠질까봐 좀 겁이 나요.” “목사님, 제자훈련 받고 싶기는 한데요, 그러다가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날마다 성경을 들고 돌아다니면 어떻게 해요? 그게 겁이 나서 못하겠어요.”라고, 반응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왜 예수를 믿고,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왕 믿을 바에는 적당히 믿지 말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평범한 일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특별한 일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학력, 인물, 빈부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회개합시다.

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은 근심하고 탄식할 뿐 절대로 우리 안에 충만하시지 못합니다.

따라서 진지하게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말 한마디 잘못한 것도, 어떤 때는 성령님께서 체크하시고, 가족에게 잘못한 것도, 하나님께서 체크하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내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간 것까지도, 주님 앞에 나와 머리 숙이면 성령님께서 체크하십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4. 주 안에서 이미 우리는 충만한 자들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충만을 허락하셨고,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이미 충만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2:10절에 보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의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고, 3: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니와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 것까지 넘치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는 차고 넘치게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원래 충만한 분이시오, 절대적인 주권자요,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요, 영광 가운데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충만을, 어떤 체험이나 감정만 가지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기도하거나 찬송할 때, 성령이 충만하여 격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흥분도 따릅니다.

오히려 흥분하지 못하고 냉정한 사람보다는, 흥분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은 흔히 감정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을 보니 하늘이 열리고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하고, 하늘을 우러러 외친 스데반집사처럼,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저절로 두 손이 올라가고, 소리도 높아지고, 어떤 때는 눈물도 흐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이 그야말로 천사의 날개를 달고 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이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교회는 이런 감정에, 좀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메말라 있으면, 기도도, 신앙생활도, 가정생활도, 부부생활도, 대인관계도, 맥 빠진 것처럼 하게 됩니다.

감정은, 윤활유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에는 지식적인 측면도 매우 중요합니다.

3:17-19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이 감옥에서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 기도에서 사랑, 깨달아, 충만이라는 단어가 놓인 순서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성령충만의 전형적인 코스로, 먼저 하나님의 진리,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진리를 알고 깨달을 때, 성령 충만해진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주여, 이 진리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이 진리를 알면 알수록 더 깨닫는 역사도 주시고, 깨달을 때에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반쯤 채워져서 고통당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성령 앞에 마음을 다해 구합시다.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한 사람이 됩시다.

약간 별나 보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성령에 사로잡혀서 일하는 것만큼 보람있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사용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 이 시대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들어 쓰시는 그릇이 되어 스데반 집사님처럼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