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목숨 걸고 말하다 (사도행전 6:10-11)

Johnangel 2022. 6. 3. 19:27

목숨 걸고 말하다 (사도행전 6:10-11)

 

초대교회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스데반집사는 “예수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입증한 전도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사도들보다 오히려 스데반집사가 탁월했습니다.

 

스데반집사는 막연히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약점을 들추어내며, 예수그리스도를 언급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하셨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스데반집사처럼,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환부를 건드리는 작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접근 방법부터 달랐습니다.

 

1.스데반의 설교는 생명을 건 메시지입니다.

 

아픈 곳을 건드리는, 스데반집사의 메시지는, 듣는 유대인들을, 도무지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점이, 스데반집사의 강점인 동시에, 또한 약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극심한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집사를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집사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과녁에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그 배후에 작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대부분 경우,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의 약점을 찌르거나, 숨기고 있는 것을 들추어내거나, 말하기를 꺼려하는 부분을 이야기하면, 비교적 열매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명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만, 오히려 강한 반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는, 조금 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데반집사가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식으로 전했다.”고는, 절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집사가 기독교의 최초순교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제물로 받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순교자다운 메시지였습니다.

스데반집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제물로 바친 전도자답게, 생명을 걸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의 죽음으로 인하여, 훗날 그가 전한 복음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2.스데반의 설교는 직설적인 복음 증거입니다.

 

스데반집사의 공격적인 모습에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할 때, 평소에 그 사람이 괴로워하고, 쑥스러워하는 부분에, 가책을 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아마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독이 올라, 반발심만 커질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탄이 그런 인간의 마음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나, 전도하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은, 복음뿐만 아니라, 사람도 잘 알아야합니다.

“어떻게 다가가야 그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해야합니다.

 

물론 복음의 능력에 의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복음을 들고 나가는, 우리 자신도 지혜로워야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성령의 강력한 인도에 이끌려 과격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우리가 온건한 방법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때도 있습니다.

 

분명히 욕먹을 줄 알고, 핍박받을 줄 알고, 분명히 열매보다는, 어떤 문제가 일어날 줄 알지만, 성령이 마음속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력하게 이끌고 가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한참 지난 뒤에 보면, 성령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과격한 복음증거로, 오히려 핍박이 일어나고, 고통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셨던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더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온건한 방법으로 인도하실 때는,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당장 눈앞의 결과를,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때는, 복음을 전하며 “내가 좀 심하게 말하지 않았나?”싶기도 할 것입니다.

“좀 부드럽게 전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후회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성격보다 성령님이 강하게 이끄셔서 그 말을 하도록 하셨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후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 열매를 어떻게 맺으시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3.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 들어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온건파도 있었고, 강경파도 있었습니다.

주기철목사의 부인이신, 안이숙사모와 같은 분이 온건파에 속합니다.

온건파에 속한 분들은, 일단 감옥에 들어가면, 시종일관 그 감옥의 질서대로, 모범을 보이는 생활을 했습니다.

 

조사를 받을 때도, 상대방이 큰소리로 나오면, 겸손하게 가만히 있고, 비위를 가급적이면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주 부드럽게 신앙투쟁을 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광복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강경파는,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고현교회에서도 일제 강점기 때, 박연세목사님과 이상태집사님께서 순교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감옥에서 ,아침부터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간수가 예배를 금지하면,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몽둥이로 맞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문을 받을 때는, 항상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는, 말을 서슴없이 해서, 더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싸웠습니다.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성격 탓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받은 은혜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부분이 가장 컷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빨리 받으실 사람은, 세례요한처럼 왕 앞에 가서도, 잘못을 지적하다가 목이 날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스데반집사도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도전하다가 결국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지고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개성을 통해 일하시고, 또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스데반집사가 이렇게 과격한 말로 메시지를 전했다고 해서, 그를 향해 “너무 성급했다.”거나 “지혜가 없었다.”라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온건한 목사님들이 있는가 하면, 매우 날카롭고, 강경한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향을 놓고, 사람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다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집사가 전한 메시지는,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현대판 스데반집사 같은 분이, 많이 나와야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세대는, 피가 맺히도록 부르짖어도, 듣지 않는 세대가 아닙니까?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가, 오늘날의 세대입니다.

 

7:31-32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것 같고,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순종하지 않는 왕고집이 있어서, 성경말씀까지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스스로 자기 신앙을 변호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정말 생명을 걸고, 바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합니다.

생명을 걸고 외치다가 죽는, 역사가 나타나야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낮아도 설교내용은, 칼 같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칼날이 무디어져서, 도무지 사람들 가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말씀, 사람들 눈치만 보는 그런 강단이 자꾸 많아지면,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생명을 걸고, 바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강팍한 세상에서, 이런 목회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나중에는, 우리 모두가 다 손해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