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율법과 성전을 재해석하다 (사도행전 6:13~14)

Johnangel 2022. 6. 9. 11:38

율법과 성전을 재해석하다 (사도행전 6:13~14)

 

스데반집사는, 절대로 자기감정에 치우쳐 과격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셨고,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증거 한 뒤 나타난 반응을 보면, 확실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증언하게 합니다.

거짓 증언의 내용은, 13절에 있는 대로 “성전(거룩한 곳)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집사의 죄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성전과 율법” 이것이 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문제가 되었을까요?

이 부분은 구약과 유대인들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유대인의 자존심과 율법, 그리고 성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선민의식”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은 건드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선민의식을 건드리면, 못 견디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오직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것은, 유대인들의 종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착각까지 하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분명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택하셔서 할례를 통해 선민으로 삼으시고, 다른 민족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몇 천 년 동안 존속시키시며, 그 많은 범죄와 악행을 범한 그들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종으로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은 끝까지 우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방인을 위한 종으로 봉사하라.”고, 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택하신 이유가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 율법을 주시고, 유대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유대인을 통해 복음을 주셔서, 유대인의 손으로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모든 열방 민족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유대민족을 하나의 통로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유대인들은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을, 진리로 여기는 모순 속에 살았습니다.

선택받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영원불멸한 것이며, 누구든지 율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율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곳”이라 부르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만 거하시고, 특별히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 받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율법과 성전은,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민족의 긍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이 성전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합니다.

7장부터, 스데반집사의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존재한 사람이요, 성전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지금 받들고 있는 율법과 성전을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스데반집사는 또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유대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 받은 다음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검토해 보라. 율법을 제대로 지킨 일이 있었느냐? 지금까지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의 진노만 쌓지 않았느냐? 스스로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너희들의 교만이요, 완악함이다. 율법 받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너희가 그 율법에 따라 너희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어떻게 했느냐? 지금까지 그 의로운 자들의 피만 흘리지 않았느냐?”

 

이렇게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의 아주 아픈 곳만 팍팍 찔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이 부분이 깨지지 않으면,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교만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을 회개하지 않고서는, 복음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집사는, 또 예수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는, 또 어떻게 설명합니까?

“돌로 지은 이 건물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성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누구나 다 성전이요, 어디에서나 예배드릴 수 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아무리 선택받은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예수님은 죄인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자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다른 민족처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해온 “율법과 성전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스데반집사를 죽이려 했던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평신도지만,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논리적로 보나, 박력으로 보나, 확신으로 보나, 유대인들이 도무지 스데반집사를 당할 수 없었던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10절에 보면, 바로 “지혜와 성령”으로 스데반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지혜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지혜를 특별히 받은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7:2절부터 보면, 스데반집사가 구약전체를 훑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소 그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이 남달랐으며,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지혜가 있으면,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읽게 됩니다.

공부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성경지식은 “신학생이나 교역자들만 알면 되는 것이고, 평신도는 그저 설교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구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신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까?

스데반집사는, 구약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반면 수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수천 번이나 읽고도, 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성령의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었고, 도전하고, 논쟁하고, 변호하고, 설득할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유대인의 논리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증인인, 우리는 어디서 발견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까?

구약과 신약에서, 발견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남에게 막연히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성령의 지혜는, 스데반집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과,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7장을 보면, 그가 참으로 기가 막힌 진리를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이 먼저 청소되어야 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상황에 밀려서, 복잡해진 경우가 많습니다.

시시한 것들은, 빨리 마음에서 퍼내고 되도록이면,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갖추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십시오.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전혀 귀에 안 들어옵니까?

마음에 무엇이 가득 찼는지를, 먼저 찾아내야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적절히 적용했습니다.

당시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잘 찾아내어, 예수그리스도라는 복음으로, 사정없이 깨뜨리고, 수술했습니다.

 

주후 1세기 사람인 스데반집사가, 그 시대의 문제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하면서, 당대 사람들에게 도전했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대문명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정신없이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와 어떤 목적을 주실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해답으로 제시해야겠는데, 어떻게 제시할 것입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려면, 성경을 읽으면서, 무릎 꿇고 기도해야합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 예수님은, 4:14절에서 자신을 샘물로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필요에 맞게, 자신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지혜의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 찾은 뒤, 지혜롭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사는 길이요, 21세기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스데반집사는 경건하다고 자만하던 유대인들에게서 무서운 완고함과 교만,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더러운 죄악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집사와 같이 21세기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냉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어두운 구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게 주신 성령의 지혜가 왜 오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가 절실한 이 시대에 왜 이렇게 성령과 지혜가 결핍되어 있습니까?

 

언제든 성경을 볼 수 있고, 혼자 깨닫기 힘들 때, 참고할 자료들도 얼마든지 있으며, 또 교회에서 배울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악하다고, 욕하지 맙시다.

현대인이 악해져서, 그렇고, 현대문명이 너무나 거세게 밀려와, 그렇다고 변명하지도 맙시다.

현대문명의 힘이 거센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책임진 스데반집사입니다.

스데반집사는 성령과 지혜로,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스데반집사는 성령의 지혜로, 그 진리를 그 시대에 적용했습니다.

너무 적확하게 적용해서, 그는 자기 생명을 잃을 정도로 위기를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죽을 각오, 망할 각오,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우리의 말과 태도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