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도행전 7:1-2)

Johnangel 2022. 6. 15. 20:36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도행전 7:1-2)

 

회당에서 전도하던 스데반집사가,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의 죄목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 죄였습니다.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집사에게 고소내용의, 사실 여부를 심문했습니다.

정말로 예수가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쳤는지, 거룩한 성전을 헐어버려야 한다.”고, 선동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렇게 질문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이 질문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도 똑같이 던져진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똑같은 질문을 받고, 각각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비교해 보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보인 태도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의 대답은 “성경에 기록된 재판석에서의 자기변호 중에서 가장 길지 않을까?”생각합니다.

 

1. 같은 질문, 다른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기소내용이 전혀 근거도 없고 곡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서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전혀 자기변호를 하지 않았습니다.

심문하는 자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인 인간 앞에서, 자기변호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님께 입을 열라.”고, 명령할 수 없고 “왜 변호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발언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재판석에 앉았다.”고 해서, 인간이 예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죄인석에 섰다.”고 해서, 예수님이 인간보다 낮아지신 것도 아닙니다.

엄연히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바뀔 수 없는 관계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변호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스데반집사는, 말문을 열자마자 일사천리로, 조상 아브라함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전부 훑고도 모자라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까지 언급했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있을 때, 예수님 편에 서서 진리를 말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요, 누군가 예수님의 진리를 왜곡할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목숨을 걸고, 말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집사는 예수님의 증인이기에,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고소된 내용이 전부 잘못됐다.”는, 것을 밝히며, 거세게 반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격렬한 말이 나올 줄 알면서도,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기 생명을 내놓고, 긴 시간 동안 예수님의 편에 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의 이러한 대답은, 사실 변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무도 예수님을 변호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변호합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요,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변호가 필요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을 변호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대로, 깨달은 대로, 스데반집사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2. 분명한  아니요입니다.

 

증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신앙고백이자,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정죄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외면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세상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인, 우리는 스데반처럼, 명료하게 대답해야합니다.

세상 앞에 선 증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 편에 서서 그분을 증거해야합니다.

입을 열어야할 때,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를, 분명히 밝혀야합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 앞에서도, 스데반집사처럼, 확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5:37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지적하신, 이 말씀에 주의해야합니다.

“예”라고, 대답하야 할 때는, 분명히 “예”할 것이요,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할 때는 “아니요”라고, 말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는, 이 둘밖에 없습니다.

절충이나, 타협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에 대해 옳게 말할 때는 “옳다”고, 말해야 하고, 잘못 말할 때는 “잘못됐다”고, 말해야합니다.

모호한 말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직장에서 얼마만큼 명료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 물을 때, 얼마만큼 정확하게 대답하십니까?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인지 “아니요”인지 모호합니다.

다시 말해서 “분명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사업상 술자리에 할 수 없이 끌려가더라도, 옆에 앉은 여자에게 “나는 예수 믿는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술잔을 들고 어정쩡하게 있습니다.

누가 “교회 나가나 보죠?”하고 물으면, 그냥 씩 웃고 적당히 넘어갑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닙니다.

 

이렇게 불분명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손해는 자신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호하게 말하면, 내 입만 더러워지고, 신앙상태만 흐릿해지고, 나중에는 시험에 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신앙고백을 바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신앙 때문에, 스데반집사처럼 재판석에 서고, 생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고 해서, 당장 직장이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안 믿겠다.”고, 한마디만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곤궁에 처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고백답지 못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자신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될 만한 자격도 안 됩니다.

성령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수만 명의 성도가 있어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차라리 순진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회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교회 교인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흩어져 살아가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성령의 손에 쓰임 받는 교회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잘 받아들여도, 생활터전에서, 혹은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야 할 때, 그 말이 분명하지 않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분명히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내가 이웃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했다면, 회개해야합니다.

 

사회생활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지 못하고, 증거 하지 못해서 날마다 머뭇거리며 눈치 보는 생활을 했다면, 회개와 함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칼같이 날카로운 메시지입니다.

 

스데반집사의 분명한 대답 속에는, 눈여겨보아야할 두 가지 논점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고,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아브라함의 진면모를 보여 주어, 아브라함이 그들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스데반집사를 잡아 온 사람들이나 스데반집사를 재판하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사탄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세례요한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3:9절을 읽겠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예수님도 이와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따르던 유대인들이 자신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8:39-40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심지어 예수님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손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8:4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의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으라.”

 

그렇습니다.

육신의 혈통은, 아브라함에게 받아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태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스데반집사의 결론도,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7:51-52절을 읽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여기서 말하는 조상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결국 스데반집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브라함과 너희는 다르며” 그렇게 때문에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를 갈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의 날카로운 메시지는 계속됩니다.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조상 아브라함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강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무엇이 그들과 달랐기에, 스데반집사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전적인 은혜를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으로서 유대인과 달랐다.”는 것을, 스데반집사는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안에서 배운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식적으로 아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평생토록 동행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저 영광스런 보좌에 계신 온 우주의 주인이자, 우주만물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비해, 아브라함은 너무나 비천했습니다.

 

사실 두 존재는, 도무지 만날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하나님이 비천한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빛으로, 길로, 진리로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