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다 (사도행전 7:2~4)

Johnangel 2022. 6. 20. 21:05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다 (사도행전 7:2~4)

 

스데반집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조상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다.”고, 강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브라함과 무엇이 달랐기에, 스데반집사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스데반집사는 “아브라함은 전적인 은혜를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으로서 당대 유대인과 달랐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율법 안에서 배운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상식적으로 아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평생 동안 동행할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만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하늘나라 영광스런 보좌에 계신 온 우주의 주인요, 또한 우주만물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비해 아브라함은, 너무나 비천한 존재였기 때문에, 사실 두 존재, 즉 영광의 하나님과 비천한 아브라함은, 도무지 만날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비천한 아브라함을 왜 찾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1.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고, 하나님은 철저히 능동적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습니다.

그것도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24: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 24장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상들은 하란 땅에 있을 때, 다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다른 친족들과는 달리 그가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조상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시고, 이런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전적인 은혜를 경험한 아브라함에게는, 즉각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나서,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정도로 변했습니까?

자신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일가친척을 다 버리고,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날 정도로 변했습니다.

떠나는 아브라함을 전송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참 불쌍하다. 돌았나봐. 어디가 잘못됐나봐.”하고. 수군수군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행선지를 물을 때, 그는 “글쎄, 나도 잘 몰라요. 그냥 떠나는 거예요.”하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이런 큰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를 고소한 유대인들은, 혈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을 펴놓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매달렸다면, 분명히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그들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데반집사를 향해서 이를 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 내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아닌지 한번 점검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 교회에 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는 것은, 태양이 가진 빛 때문에 보는 것이다.”

 

이 말은, 평범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은, 내 눈 때문이 아니라, 태양 자체의 빛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양이 자기를 내보이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의 시력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나를 발견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끌어올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 산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꼭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속에서,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동행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어둠과 결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 말은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14:26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 그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냐?, 고향 땅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을 사랑할 것이냐?”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두말없이 고향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을 향해, 아브라함은 꿋꿋이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에는, 거룩한 구별, 즉 성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나왔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던, 우리가 생명의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즉 “중생을 경험”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라.”는, 음성을 들으면, 두말없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그렇게 소중하던 부모도, 형제도, 예수님만큼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그렇게 커 보이고, 중요해 보였지만,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는, 떠나온 고향이 희미해지듯이, 다 희미해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집사 앞에 있는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아브라함에 비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닮았습니까?

정말로 아브라함처럼,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님만 따르지 못하고, 가족의 상황에 따라 신앙이 좌지우지되기도 합니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거룩한 분리인 것입니다.

 

4:4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생각이나 취미나 인생의 목적이, 세상에 그대로 뿌리박혀 있다거나,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떤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비록 교회에 다닌다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신앙인답게 행동하고, 다시 되돌아가는 그런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세상에 두었던 미련을 완전히 끊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만 둡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지금까지 좋았던 것들에 정이 떨어집니다.

 

이런 변화없이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가겠습니까?

무슨 힘으로 하나님나라에 갑니까?

무언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래도 저 천성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이 이 땅에 발 딛고 서있는데, 근본적인 마음에 변화 없이, 어떻게 이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믿음의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3:11-14절을 같이 읽고,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제가 요즘 건강을 위해 10km를 목표로 하고, 걷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걸으면서 제가 반복하여 외치는 기도는

⓵예수이름 나의구원

⓶예수보혈 나의생명

⓷예수부활 나의부활

⓸성령충만 나의능력

⓹나의능력 복음전도입니다.

5개의 구호는, 모두 다 주님으로부터 내가 받는 축복이고, 1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영혼구원을 위한 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1개의 명령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영.육간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모두 금년에 1명이라도 영혼전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