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광야교회의 온유한 지도자 (사도행전 7:35~36)

Johnangel 2022. 7. 13. 21:22

광야교회의 온유한 지도자 (사도행전 7:35~36)

 

38절을 읽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여기에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흔히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신약시대에만 있고, 구약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시시대의 교회를 놓고, 38절에서 “광야교회”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데반집사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집사는, 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연단 받고 배우고, 기다린 곳이 바로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전체를 교회생활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시대교회나, 구약시대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에는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백성의 모임이었고, 신약시대 때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시대교회는 할례로 구별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고, 신약시대교회는 성령으로 태어나서 성령 충만으로 세상과 구별된 백성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혈통의 사람들”과 “중생의 사람들”로, 나누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는, 모세라는 “지도자”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회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7:17-38절까지 모세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지도자에 대한 약속이자, 광야교회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한 그의 리더십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39-43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약속이자, 광야교회 회중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성향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광야교회 리더십인 모세와, 광야교회 회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한마디로 각각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했고, 95:8절에 보면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모세에 대해서는 “온유하다.”는, 표현을 썼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완악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교회는, 한마디로 “온유한 지도자”와 “완악한 회중”이라는, 어울릴 수 없는 요소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광야교회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와 같은 성경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지도자를 통해, 참다운 리더십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악한 교인들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1.모세는 완악한 회중을 이끄는, 온유한 지도자입니다.

 

모세의 온유는, 두 가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손에 철저히 자아가 깨지는 훈련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고 하는 철저한 “소명의식”입니다.

 

모세는 본래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의기양양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사”를 쓴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모세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모세가, 자신의 혈통을 알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23절을 읽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는 자신이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혈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의 힘으로 동족 이스라엘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자신이 누리는 모든 특권을 이용해 자기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7:24절을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는 무력으로 자기 백성을 한번 건져보겠다고 덤볐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자기 스스로 “나는 이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스스로 이미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은, 절대 온유한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도 배경으로 보나 여러 가지 재능으로 보나, 이만하면 목사가 될 만하지 않을까?” 혹은 “이 정도면 교회 장로가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아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온유한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나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내 생명을 걸고라도 이 직분에 충성하리라.”고, 하는, 뜨거운 소명의식 없이, 그저 신학교를 다녔다거나, 혹은 교회에서 투표로 뽑혔다고 해서, 교회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2.반드시 자아를 깨뜨리는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어리석은 교만으로, 으스대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단번에, 미디안 광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자아가 깨어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야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왕자라는 신분, 학문, 과거에 가졌던 황홀한 꿈들이, 모두 다 깨어졌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모든 것들도, 다 녹이 슬어버렸습니다.

모세가 가진 그런 것들은, 이제 모두 다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것은, 온유함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의 리더십은, 인간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없이 끝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예전에 왕자 옷을 입고, 사람을 쳐 죽이며, 지도자 행세를 하던 그 모세와, 나중에 가시떨기 불꽃 앞에서 신발을 벗고, 엎드린 그 초라한 모세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볼 때, 광야의 모세는 도무지 지도자 같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양을 치는 목자, 초라하고 무능한 사람, 실패자, 좌절에 빠진 한 인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자아가 깨어져 하나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온유한 지도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온유”에 대한 한 가지 흔한 우리의 오해가 있습니다.

“온유하다.”라는 것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친절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상냥하고 부드럽습니까?

예수님도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온유가 그렇게 느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지도자가 갖는 온유는, 교회가 지워 주는,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져야 할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인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을, 끝까지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완악한 회중이 주는,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동안 키워주셨습니다.

“온유”라는, 능력이 모세에게 없었다면, 광야교회는 사분오열이 되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끝까지 짐을 짊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호렙산 꼭대기로 올라가, 40일 동안 낮과 밤에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며,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사람에게 자기감정을 풀지 않고,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위해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순종하는 사람,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광야교회 리더십은, 이처럼 철저한 온유로 무장한 리더십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는,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이 맡기신 양 떼 외에는, 생각도 하지 않은 모세의 온유함, 이 능력을 가져야합니다.

 

이것은 목사와 장로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우리 모든 평신도들 모두가 다 “온유”라고 하는, 이 능력을 가져야합니다.

특히 교회리더십에는, 반드시 온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 앞에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벗어 버리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한국교회마다 이런 “온유한 지도자”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고현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들은, 이런 “온유”로, 무장한 리더십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부흥하는 교회들이, 아무 고난 없이 성장한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인들 왜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형통한 교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는, 십자가를 지는 평신도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 안에는 온유한 사람들, 온유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면, 십자가를 질만한 힘이 없는 완악한 교회, 교회의 문제점을 품고, 끝까지 인내할 수 없는 교회, 온유가 결여된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가장 강퍅하고 완악한 교인들의 십자가를 짊어진, 모세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이신 우리고현교회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지기를 기대하며, 자기감정을 풀지 않고,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순종하는 사람,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온유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광야교회의 온유한 지도자

사도행전 7:35-36

38절을 읽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여기에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흔히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신약시대에만 있고, 구약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시시대의 교회를 놓고, 38절에서 “광야교회”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데반집사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집사는, 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연단 받고 배우고, 기다린 곳이 바로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는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전체를 교회생활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시대교회나, 구약시대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에는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백성의 모임이었고, 신약시대 때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시대교회는 할례로 구별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고, 신약시대교회는 성령으로 태어나서 성령 충만으로 세상과 구별된 백성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혈통의 사람들”과 “중생의 사람들”로, 나누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교회는, 모세라는 “지도자”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회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7:17-38절까지 모세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지도자에 대한 약속이자, 광야교회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한 그의 리더십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39-43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약속이자, 광야교회 회중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성향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광야교회 리더십인 모세와, 광야교회 회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한마디로 각각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했고, 95:8절에 보면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모세에 대해서는 “온유하다.”는, 표현을 썼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완악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교회는, 한마디로 “온유한 지도자”와 “완악한 회중”이라는, 어울릴 수 없는 요소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광야교회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와 같은 성경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지도자를 통해, 참다운 리더십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악한 교인들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1.모세는 완악한 회중을 이끄는, 온유한 지도자입니다.

 

모세의 온유는, 두 가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손에 철저히 자아가 깨지는 훈련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고 하는 철저한 “소명의식”입니다.

 

모세는 본래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의기양양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사”를 쓴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모세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런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모세가, 자신의 혈통을 알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23절을 읽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는 자신이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혈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의 힘으로 동족 이스라엘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자신이 누리는 모든 특권을 이용해 자기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7:24절을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는 무력으로 자기 백성을 한번 건져보겠다고 덤볐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자기 스스로 “나는 이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스스로 이미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은, 절대 온유한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도 배경으로 보나 여러 가지 재능으로 보나, 이만하면 목사가 될 만하지 않을까?” 혹은 “이 정도면 교회 장로가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아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온유한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나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내 생명을 걸고라도 이 직분에 충성하리라.”고, 하는, 뜨거운 소명의식 없이, 그저 신학교를 다녔다거나, 혹은 교회에서 투표로 뽑혔다고 해서, 교회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2.반드시 자아를 깨뜨리는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어리석은 교만으로, 으스대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단번에, 미디안 광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자아가 깨어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야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왕자라는 신분, 학문, 과거에 가졌던 황홀한 꿈들이, 모두 다 깨어졌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모든 것들도, 다 녹이 슬어버렸습니다.

모세가 가진 그런 것들은, 이제 모두 다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남겨주신 것은, 온유함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의 리더십은, 인간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없이 끝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예전에 왕자 옷을 입고, 사람을 쳐 죽이며, 지도자 행세를 하던 그 모세와, 나중에 가시떨기 불꽃 앞에서 신발을 벗고, 엎드린 그 초라한 모세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볼 때, 광야의 모세는 도무지 지도자 같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양을 치는 목자, 초라하고 무능한 사람, 실패자, 좌절에 빠진 한 인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자아가 깨어져 하나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온유한 지도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온유”에 대한 한 가지 흔한 우리의 오해가 있습니다.

“온유하다.”라는 것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친절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상냥하고 부드럽습니까?

예수님도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온유가 그렇게 느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지도자가 갖는 온유는, 교회가 지워 주는,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져야 할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인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을, 끝까지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완악한 회중이 주는,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동안 키워주셨습니다.

“온유”라는, 능력이 모세에게 없었다면, 광야교회는 사분오열이 되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끝까지 짐을 짊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호렙산 꼭대기로 올라가, 40일 동안 낮과 밤에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며,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사람에게 자기감정을 풀지 않고,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위해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순종하는 사람,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광야교회 리더십은, 이처럼 철저한 온유로 무장한 리더십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는,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이 맡기신 양 떼 외에는, 생각도 하지 않은 모세의 온유함, 이 능력을 가져야합니다.

 

이것은 목사와 장로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우리 모든 평신도들 모두가 다 “온유”라고 하는, 이 능력을 가져야합니다.

특히 교회리더십에는, 반드시 온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 앞에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벗어 버리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한국교회마다 이런 “온유한 지도자”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고현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들은, 이런 “온유”로, 무장한 리더십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부흥하는 교회들이, 아무 고난 없이 성장한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인들 왜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형통한 교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는, 십자가를 지는 평신도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 안에는 온유한 사람들, 온유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면, 십자가를 질만한 힘이 없는 완악한 교회, 교회의 문제점을 품고, 끝까지 인내할 수 없는 교회, 온유가 결여된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가장 강퍅하고 완악한 교인들의 십자가를 짊어진, 모세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이신 우리고현교회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지기를 기대하며, 자기감정을 풀지 않고,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죽이고, 순종하는 사람,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온유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