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울의 가슴에 스데반의 피가 번지다 (사도행전 7:55~58)

Johnangel 2022. 8. 10. 23:37

사울의 가슴에 스데반의 피가 번지다 (사도행전 7:55~58)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에서는, 큰 싸움인 것입니다.

 

사탄은, 그 소리를 죽어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을 믿지 않으면 멸망 받는다.”고, 전도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을 두고 사탄과 나 사이에, 근본적인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구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내 생명을 내놓고, 증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를 위해,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1.보좌에서 일어나 기다리시는 예수님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 서 계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는 심판자를 의미하고, 서 계신다고 말할 때는 중보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중보자다. 심판자다,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너무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해석 같다. 예수그리스도가 서 계시든 앉아 계시든 간에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요, 모든 생사를 주관하시는 주요, 모든 역사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주권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해석이 좀 더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서 계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 스데반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던지는 “스데반집사를 그냥 앉아서 영접하실 수가 없으셨는지?” 주님께서는, 스스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맞이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영접하신 주님이 서 계셨다면, 마지막 수를 채우는 순교자가 하나님나라에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도, 주님은 서서 그들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순교자는 너무나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이처럼 놀라운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자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살면, 무엇합니까?

고대광실 좋은 집에 살면 무엇하며, 왕좌에 앉아서 세계를 호령한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죽고 나면, 모든 것이 꿈같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그 사람을 일컬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스데반처럼 돌무더기에 깔려 죽거나,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비참하게 죽거나, 바울처럼 칼날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바로 우리 주님이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영접해 주시는 영광을 누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누릴 “영원한 행복과 영광”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꿈이 있어야합니다.

“주님, 세상적으로 볼 때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남에게 멸시도 당할 수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너무나 초라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끝난 다음 주님 앞에 서는 순간부터, 하늘 영광이 나를 둘러싸고, 주님의 팔이 나를 안아 주신다면, 땅의 것을 한순간에 다 포기하고, 고난 받기를 택하겠습니다.”

여러분, 미래의 꿈과 영광을 사모하는 간절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세속화된 종교입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 만한, 그런 위기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욕도 먹고, 조롱도 받고, 어떤 때는, 물바가지를 뒤집어쓰는, 그런 모험도 한번 겪어 봅시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런 일 당할 각오를 하고, 그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길 정도로, 우리 자신이 내세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2.스데반을 거두시고 사울을 그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한 이유와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사울이 그 일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혈기가 왕성한 새파란 청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자처하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유대교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골수분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의 엘리트 사울과, 기독교의 엘리트 스데반을 바꾸셨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스데반을 사용하시는 것이 더 영광이요,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일을 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스데반을 싹 거두어 가시고, 그 자리에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깊은 뜻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그 진리의 깊고, 오묘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사울을 낳기 위해 죽은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소리 없이 흘러도, 거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맙니다.

스데반은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더 위대한 복음전도자를 남겨 놓고, 대신 죽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사울의 주치의인 누가입니다.

누가는, 사울에게 전도를 받았고, 일생 동안 사울을 따라다니며, 선교에 동역한 제자였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마지막 장면, 스데반이 마지막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던, 그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을, 누가는 누구에게서 상세히 듣고 기록했을까요?

아마 사울에게서,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그 사건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생히 목격했고, 그 일을 한시도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복음 전도자가 된 사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주 말했던 것으로 보아 “스데반을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그야말로 조난과 굶주림과 강도의 위험을 당하면서, 모든 쓴잔을 달게 마시며,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라도 끝까지 자기를 기뻐했던, 그 마음 바닥에는 “스데반의 몫까지 감당하겠노라”는, 강한 책임감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순교자의 피는, 강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죽어도 소리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늘을 향하여 소리친 것처럼, 스데반의 피는 사울의 가슴속에서, 그의 심장 박동과 함께,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성장한 이유도,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소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3.목숨이여 안녕, 죽음이여 오라.

 

우리는 순교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정신만큼은 이어받아야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날마다 죽기 위해 사는, 순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면 순교의 대열에 서겠다.”는, 각오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시면,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순교자가 되고 싶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로마시대에 “줄리타”라고 하는, 귀족 여성이 있었습니다.

“줄리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황제가 그녀를 불렀습니다.

황제는 “줄리타”에게 “로마 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로마법도, 재판관들도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하며, 결국 생명까지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에 줄리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목숨이여 안녕, 죽음이여 오라, 부귀여 안녕, 가난이여 오라.”

 

그렇습니다.

그녀는 예수그리스도께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줄리타”는,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고현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금 평안하다.”고, 안심하지 맙시다.

안일한 생활만 바라고, 어떻게 해서든 그저 무난하게 넘어가기만을 바라는 사고방식으로는, 장차 닥칠지 모를, 어려운 때를 견뎌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썩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능력은, 환난 때나, 평안할 때나, 한결 같이, 자녀들을 순수하게 보전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그 능력에 맡깁시다.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아무리 세상이 평안하다 할지라도, 줄리타처럼 왕궁에 산다 할지라도, 절대 부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지와 감정으로, 예수 믿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