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스데반의 뒤를 잇다 (사도행전 9:19~25)

Johnangel 2022. 10. 21. 13:56

스데반의 뒤를 잇다 (사도행전 9:19~25)

 

사울은 이제 완전히, 예수 믿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주님의 은혜로 잃었던 시력도 되찾았고, 음식을 먹고 육체의 건강도 되찾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울이 주님의 자녀요, 복음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예수를 믿고, 복음의 증인이 되자,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1. 사울은 제자들과 교제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며칠 사이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변화 받은 사울은, 교제하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사울은 이제 더 이상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교제하는, 모든 주변 사람들의 대상이 전부 싹 다 바뀌었습니다.

 

누구로 바뀌었습니까?

그들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 즉 예수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제자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이렇게 교제의 대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영적인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 깊은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쪽으로 더 가까워지며 몰입하게 되고, 그에 따라 다른 쪽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친구는 여전히 옛날 친구 그대로이고, 술잔을 기울이며, 기분 내는 친구들과 여전히 즐겨 어울린다면,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니까, 세상 친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습니까?

그래서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하십니까?

물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10년, 20년을 같이한 친구들과, 흉허물 없이 술 한 잔 들면 “만사 오케이”였던, 그런 친구들이 갑자기 멀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이미 예수를 모셨고, 그 친구들 대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된 영적지체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세상이 인정하는, 탁월한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었지만, 예수 믿고 변화 받자, 한순간에 주변사람들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싶다면,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정확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 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바울의 전도방법은 스데반과 꼭 닮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사울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자신과 함께 기독교를 핍박해 온 동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인 것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변화에 놀란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사울은 다행히 이 사실을 알고, 다메섹에서 탈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사울은 다메섹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에서도, 사울을 죽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짧은 분량의 말씀 안에, 다메섹과 예루살렘, 두 곳에서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가는 곳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무조건 만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무서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습니다.

 

“어떻게 사울은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베드로도 같은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게까지 주변을 거칠게 자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가는 곳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사람들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는 곳마다, 극단적인 살해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울은 두 가지 면에서, 다른 사도들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갑자기 신앙을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급격한 변화는, 그때까지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고, 동시에 예전에 사울에게 핍박당한 기억이 생생한 사람들에게도,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사울의 전도방법입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다메섹에서 전도하던 사울은,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예수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증언한다.”는 말은 “변론한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기어코 상대방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당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굉장히 도전적인 방법입니다.

29절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들이 무어라 하든지 말든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도전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사람에게는, 이론으로 끝까지 대항해서, 상대방이 굴복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유대교의 구약을 신봉하는 자에게는, 끝까지 구약으로 증명해 가면서, 상대방의 말을 꺾어버렸습니다.

 

사울은 변론하기를 좋아하고, 증명하기를 좋아하고, 상대방을 굴복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원수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러한 점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와 닮은 것 같습니까?

바로 그가 죽인 스데반집사입니다.

사울의 변론 스타일은, 스데반집사와 꼭 닮아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집사에게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별로 지식이 없어 보이는, 스데반집사의 입에서 나왔던, 도무지 대항할 수 없는 열변, 구약성경을 통달하여 거리낌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던, 그 빛나는 자세를,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돌더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스데반의 입에서 나오던,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고 스데반이 가졌던 믿음, 그 자세를 이어받은 다음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이런 각오가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두려움이나 겁이 없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식이었습니다.

변론 스타일도, 거침없는 용기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세도, 스데반집사와 꼭 닮은 꼴이었습니다.

 

3.사울이 받은 전도훈련방법입니다.

 

우리가 만약 사울의 이런 전도방법을 따른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한번 물었다 하면 끝까지 놓지 않고, 어느 한편이 꺾여야 비로소 끝을 내는 스타일로 전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을 생각하며,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전도를 어떤 획일적인 방법으로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울도 사실 시종일관 과격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변화 받은, 초기의 전도스타일이 그랬던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의 스타일과 성격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접근할지,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에 대한 모든 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간혹 너무 지나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권고에도, 아량 곳 하지 않고, 끝까지 그 방법을 고수합니다.

상식이 없어 보이고, 교양도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그 방법이 이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하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는, 남편의 전도를 위해 기도하면서,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미지근하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저래 가지고 어떻게 남편을 구원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깨가 축 처진 남편이 아내를 따라 나오는 것을 볼 때면 “아 저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저렇게 하라고, 마음속에서 지시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법대로 전도하게 됩니다.

전도하기에 앞서 그 대상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계속 기도하다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나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반응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전혀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겠다고 무슨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사람을 만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좀 과격하게 나온다든지, 무언가 생각 밖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러고 나면 “아, 그 사람 마음이 몹시 상했을 텐데 어떻게 하지? 이젠 전도하기 틀렸구나.”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 희한하게도, 강하게 찌른 말이, 그 사람을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누가 그렇게 전도하도록 한 것입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사울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보여준, 그의 전도 스타일도, 성령께서 인도하신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처음부터 도전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신 것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사울이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방을 위한 복음의 그릇으로 연단하시려고, 그런 방법으로 이끄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야 할 길에는, 무수한 해와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영적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사울이 음모를 피해, 다메섹을 탈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보다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9:24-25절을 보면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달아내리니라.”고 했고, 고후11:32-33절에 보면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레다 왕은, 당시 다메섹 지역을 통치하던 인물로, 아마도 사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아레다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울이 “얼마나 어려운 위기를 당했을까?”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피신시키지 못할 만큼, 하나님은 무능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때가 되어 부르실 때는, 순교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울을 이미 이방에 복음을 증거 하는, 그릇으로 삼으시고,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만나 이끄신 주님께서, 그렇게 쉽게 죽도록 놔두시겠습니까?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 밖으로 도피시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의 제자들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벌써 사울에게는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 사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할 때, 마음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내가 전도해서 낳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낳은 사람, 복음으로 낳은 사람은, 어려운 위기에서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외롭지 않게 살려면, 전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양육과 훈련을 통해 복음으로 낳지 않은 사람은, 그가 장로나 집사라 하더라도, 혹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한 10년 지나면, 그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낳고, 기른, 영적자녀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전도뿐만 아니라, 목장이나 소그룹을 인도할 때, 나를 통해 변화 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만큼 서로 영적으로 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알찬 교회가 되려면, 그 교회를 통해 예수 믿은 사람이 많아야 하고, 그 교회를 통해 영적으로 변화 받은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 교회를 통해, 주님과 만난 사람이 많으면, 그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집 울타리를 뜯어서 자기 울타리를 삼듯이, 남의 교인들을 끌어다가 교회를 채우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하여, 이왕 교회를 옮긴 성도라면, 그 교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새롭게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