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기도 (누가복음 11:1. 22:39~46)

Johnangel 2022. 10. 23. 07:35

기도 (누가복음 11:1. 22:39~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하시고,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 자신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기도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1. 기도는 일상의 습관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습관이라는 말을, 때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준다면, 자녀 교육의 90%는 이미 성공했다고 할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규칙적으로 독서하는 습관, 예습하고 복습하는 습관, 운동하는 습관,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교회 가는 습관,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 주었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기대하시겠습니까?

자녀 교육은 끝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습관은,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습관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기도하는 습관이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2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내일 십자가를 지게 되는 사건 때문에, 그곳에 가신 것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22:39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예수님께서 무엇을 따라 그가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까?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그가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그의 일상의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결코 형식적인 습관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눅11:1절에 보면, 어느 한 곳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기도가 일상적인 형식이었다면, 주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들은 그냥 “주님께서 기도 잘 끝내셨구나.” 이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의 태도가 주는, 어떤 감동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1: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을 목마르게 한 것입니다.

그들도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일상적 습관이 아닌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그분의 삶의 거룩한 리듬이셨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실존의 방식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기도를 호흡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습관적으로 하며 삽니다.

그러나 호흡을 멈추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생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바로 그런 “생명의 호흡”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거룩한 습관이었던 기도를, 우리의 거룩한 습관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사느냐? 죽느냐?”입니다.

살고 싶으시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거룩한 습관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는 위기의 극복이었습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특별한 위기를 만나면, 더욱 특별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범을,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그분의 생애에서, 위기중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물론 “기도로 직면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한 것은, 그분에게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은, 그분이 언제나 습관적으로 찾던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 밤도 예수님은, 그분이 익숙했던 그 장소에, 기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일상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22:4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의사이며,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동원한 수식어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땀이 핏방울 같이”

그렇습니다.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때로는, 조용히 침묵으로 기도하는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잠잠히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의 기도가 필요한 것처럼, 강청의 기도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아마도 대부분의 기도의 시간에, 그는 조용한 침묵의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통곡하실 수밖에 없는, 밤이셨습니다.

저는 히5:7절의 말씀이, 그날 밤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저는 우리가 침묵이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기도하지만, 통곡이 필요할 때는 통곡하며,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뻐할 때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하지만, 울어야 할 때는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여러분에게 눈물을 요구하신다면,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차라리 그 솔직한 눈물을 보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통곡으로 기도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왕하20: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구하노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어지는 열하20:5절에서, 우리는 주님의 응답을 발견합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통곡을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이 이런 비상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고, 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인생의 비상 상황에서,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범을 보이셨다면, 우리도 당연히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기도함 그 자체가, 위기의 극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도, 우리에게도, 기도는 위기 의 극복입니다.

 

3.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보면, 그분은 일생의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그의 공생애를, 광야의 기도로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택하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시고자, 그들을 밤바다에 보내놓고,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하루 종일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지친 다음 날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기도로 “그날 어느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계획하시고, 결정하십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통해, 우리 인류부활을 가르치시고자, 그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말씀이,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이시고자 하는 영웅심리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2:42을 읽겠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11:1절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일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셨던 것입니다.

저는 기도가 기적을 이룬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믿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다면, 지금도 우리가 기도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을 품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비극적인 이 사건을,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마무리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꾸었습니까?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그렇게 기도를 믿고, 기도로 역사를 바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꾀나 재주, 그리고 열정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사역의 방법임을 믿는 사람들을, 지금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기도로 사역하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일까요?

기도의 거룩한 습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의 멋진 지도자들과 사역자들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