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에 감동을 주는 교회 (데살로니가전서 1:1-10)
예수 믿고 세례 받아 교회의 멤버가 된 성도들이라 하여 모두 똑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교회의 건강과 가정의 성숙에 기여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명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타인을 세우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려를 자아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한국의 종교동향보고서에 따르면 개신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타종교에 더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힘 있게 선포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교회가 감동을 주지 못한 데에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기독교의 아픔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공동책임입니다.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단 3주간 머물러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믿음이 점점 성장하여 사도바울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초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삶의 모습으로 감동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는가를 통해 몇 가지 삶의 원리와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였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기본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신병훈련소에서 총검술을 연습할 때 하루 종일 끊임없이 반복연습을 시키고, 자대에 배치되어가서도 반복해서 연습을 계속합니다.
그 이유는 반복훈련으로 기본동작이 체질화되어 언제 어떠한 상황에라도 병사가 의도하는 그 동작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믿음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타오르는 불꽃에서 열과 빛을 분리할 수 없듯이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실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삶과 함께 갑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일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랑의 수고”를 통해 자기희생을 할 줄 아는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소망의 인내”를 갖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희망하며 인내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주님과 교회와 말씀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우리는 주님 앞에서나, 대인관계에서나, 물질에 대해서 성경적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아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고전15:1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였던 바울의 삶은 아름답고 견고하게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태도는 은혜에 대하여 마음이 활짝 열리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태도의 소유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끄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멘토를 잘 따랐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요즘에는 “좋은 멘토(스승)를 만나야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멘토십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누구를 멘토로 삼았습니까?
①주님을 멘토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본받은 자”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면 주님을 본받는데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②신앙의 스승들을 멘토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같은 영적인 지도자를 본받으려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와 마음을 함께할 때 축복을 받고 대인관계도 좋아집니다.
③환경을 통해서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가운데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배우기를 힘썼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기 속에 있는 기회를 통해 위대한 멘토가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성실함과 열정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멘토를 신뢰하고, 따를 때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있는 위대한 멘토로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3.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재림신앙으로 충만했습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 말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세속화화지 않고 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피로 구속받아 성도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이 너무 세속화되어 현세적인 복만 찾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에 주실 복에만 집중하니까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영적 흡입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본능에 이끌려 가볍게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열망하는 자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참된 성도는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세우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상기시켜주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세상은 “진짜배기 예수 믿는 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동이 있어야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웃의 마음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28:20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삶의 처소로 삼는다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합시다.
우리의 영원한 멘토되신 주님을 본받아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멘토로 자신을 세웁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답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세상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리스도인을 꿈꾸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다함께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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