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17-24)

Johnangel 2024. 4. 1. 13:13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17-24)

                                          

오늘날 우리 사회에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곧 “가정의 위기”입니다.

요즘의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이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구식이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야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27살쯤 되면, 아버지는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가끔은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내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가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답니다.

 

첫 얘기를 낳아 길러본 얘기 엄마들이,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 내가 애 낳아 길러 보니 엄마 맘 알겠더라.”

그렇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자식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오.

그토록 손해 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정성,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인데, 이런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닫고 감사해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처럼 “자식들은 부모 곁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곁을 떠나겠다.”는 인생의 몸부림과 그 자식 붙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성경 속의 인류 역사가 흐르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나 혼자 일어서 보겠다.”고 하는 것, 즉 “하나님 없이 살려는 몸부림” 이것이 바로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탕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요.”라고,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유산을 처리할 권리까지 요구합니다.

이것은 중동사회의 전통에 의하면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낫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결국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먼 나라입니다.

먼 나라가 어디입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혀 없는, 먼 나라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먼 나라였습니다.

신비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가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인간에게 사탄은 “먼 나라로 가라! 아버지를 떠나 뭔가를 보여줘라. 너는 아버지 없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너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 곁을 떠나!”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자식이 재산을 다 잃을 것을 알면서도 속아줍니다.

아니 믿어 주기로 작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은 재산보다 크기 때문에, 재산을 잃어버리더라도 아들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식을 공부나 성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그 자식의 능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본질로,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들고, 먼 나라로 갔던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풋내기 정도야, 유혹감,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시골 풋내기의 재산을 다 빼앗은 다음,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사정없이 폐기처분해 버리고 맙니다.

 

아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일에 지쳤을 때,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미리 각본을 써 봅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처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집을 나간 아들을 잊지 않고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고, 날마다 동네 어귀에 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돌아오는 아들을 향하여,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측은히 여겼다.”는 말은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아버지, 아들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받아 주는 아버지,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그리고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품”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버림받은 아들의 쉼터였습니다.

아버지는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 줍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용서합니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삶은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 한마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립니다.

아들이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십시오.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돈을 다 찾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온전해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온전해 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잃은 줄 알았던 자식,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돌아왔기 때문에, 마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철환”이라는 사람이 쓴 “연탄 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철사조각, 유리조각을 줍고, 버려진 상자나 신문지를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냥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만 곧 실패하고 맙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물이 툭툭 튀며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났는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위에서 허덕대며 그 아들을 위해 지붕을 수리하고 헤어진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맞고 서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눈물 짖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으로 임재하셔서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만나주시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여러분을 “귀빈”으로 초청하여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정체성을 알게 하고, 죄로부터 벗어나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생명의 법”에 매여 영생과 더불어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영접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또 주님으로 내 마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지금 나의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해 주신 예수님 나를 용서하시고 내게도 영생을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또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