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 (로마서9:1-5)

Johnangel 2022. 12. 12. 22:47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 (로마서9:1-5)

 

우리나라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혹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에 잘 맞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람보다는 자기 가족에게, 타국인보다는 자기 동족에게, 더 애정을 가진다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을 읽어보면, 바울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상식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소명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수고했지만, 항상 그의 가슴속에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교만했고, 완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배척했습니다.

 

바울이 많은 이방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온 이방 사람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바울은 더욱 더 자기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심정을, 1-3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런 이중적인 표현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에, 바울에게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근심과 고통 속에 지적하고 싶어 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특별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받게 되고, 영생을 소유하고, 기도하기만하면 언제든지 응답 받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중의 특권을 부여받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특권에 부응하는 의무를 다하고 살아가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의 특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권과 기대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우리가 받은 특권은 무엇입니까?

 

1)양자됨의 특권입니다.

 

14:1절에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영광을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언약들을 선물로 받은 특권입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들과 약속을 하시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모세와 다윗과 언약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4)율법을 수여받은 특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산위로 부르시고, 그들의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거룩한 법을 주셨는데, 이 율법은 그들의 삶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삶의 방향자체가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가 분명한 원칙인 성경말씀을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이 특권입니다.

 

5)예배의 특권입니다.

 

구약에서는 “피조물이요, 죄인 된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게 된 예배의 특권입니다.

 

6)약속들을 붙들고 사는 특권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서 언급한 언약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내일과 관련된 중요한 공동체적인 사안들이었다면, 여기서의 약속들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약속들이 있었기에, 고난의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날마다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메시야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위대한 희망의 약속이었습니다.

 

7)명예로운 조상들을 갖게 된 특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자랑할 만한 조상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아모스, 느헤미야, 등등.

그런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촌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가 약 300여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100여명이, 모두 유대인 출신입니다.

따라서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되는 셈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뉴튼, 색채의 마술사 샤갈, 작곡가 쇼팽,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정신분석학의 원조 프로이트, 세계경제계의 큰 손들이요 투자가들인 그린스펀, 조지 소로스. 이런 분들이 다 유대인들입니다.

거기다가 사도바울은 5절에서 “예수님도 육신적으로 말하면, 유대인이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이런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그렇다면 이 특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외적인 특권들이 자신을 자동적으로 특권을 누릴만한 자로 만든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외적인 특권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오판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조건들인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망각한 것입니다.

그냥 내가 선민공동체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선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선민이 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모태교인들이 종종 빠지는, 신앙의 함정에 비유할 수 있는데,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기 때문에, 나도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무디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은 유명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의 부모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축복된 특권이지만, 우리 각자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권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9장 전체를 보면,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육신적인 태어남이 아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영적인 태어남의 중요성입니다.

 

9:7-9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여러분, 어떻게 이삭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사라의 잉태가 더 이상 불가능한 가운데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삭이라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환경 안에 태어나거나, 교회공동체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집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바위를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나 혼자 의를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기초 없이 집을 짓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구세주 됨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9:31-32절을 읽겠습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의 행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관적인 의에 근거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율법을 읽고, 듣고, 토론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종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거나, 제자훈련을 마친 사람들이 “내가 직분을 받았고,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수준에 와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최선을 다해 선행을 행하더라도, 우리의 행함은 여전히 주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죄인 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예수를 믿고, 오직 그분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여러 가지 우월한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인 특권들을 소유하고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골육친척들로 인하여,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인하여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내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제발 이런 답답한 저주의 자리에 있는 내 가족과 내 형제와 내 민족이 주께 돌아오기를 소원한다.”고,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인생의 여러 특권을 즐기고 사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주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출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어떤 권세를 붙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우리가 가진 특권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오늘도 이 땅에서 살게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전도와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과, 형제와, 이웃, 그리고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비전”에 함께하는, 우리 교회가 되고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